이 책을 읽던 지난 한 달, 우연히 주변 친구들과 권력에 대한 열띤 토론을 했다. 여성에 대해서, 동물에 대해서. 그리고 개인적으로 동물의 죽음을 결정하는 것에 대해서도 많은 고민을 할 일이 있었다. 고민을 곱씹는 사이, 책의 말미에서 브레닌의 죽음을 결정하는 한 인간을 만났고, 동물의 죽음을 결정 한다는 말 자체에서 인간과 동물의 권력 관계를 다시 한 번 느꼈다.
사회에서 수용하지 않는 동물들이 무수히 많다. '사회에서' 라는 말은 인간이 구성한 사회를 말한다. 인간 사회이기 때문에 수용하지 않는 동물들이 생긴다. 실내 동물원이 금지되며 실내 건물에 남겨진 많은 야생 동물, 웅담 채취 목적의 곰 사육이 금지되며 농장에 남겨지는 사육곰, 식용 목적의 개 사육이 금지되며 뜬장에 남겨지는 개들.
이 땅에서 이 동물이 살 곳이 없는가? 인간 사회는 이 동물들에게 돈과 시간과 장소를 내어주기 싫어하는 듯 보인다. 돈과 시간과 장소는 제한된 자원이 맞다. 명확한 것은 동물의 생명과 복지는 인간 사회에서 우선 순위가 아니고 그래서 시간도 남고 돈도 남고 장소도 남을 때 그들의 살 곳이 마련된다. 이들을 돌보고자 하는 의지 또한 몹시 부재한 사회다. 때문에 이 동물들은 갈 곳이 없어 보인다. 갈 곳이 없다는 것은 살 곳이 없다는 말인데, 이들에게 더 나은 미래라는 것은 무엇일까?
안락사는 '회복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 동물들에게 인간이 내리는 인도적 조치이다. "숨을 쉬는데" "눈을 깜빡이는데" "밥을 먹는데" 라는 말은 종종 슬프고 절망적인 인간의 마음이 자포자기로 뱉어내는 울부짖음처럼 들린다. 작가가 브레닌의 죽음을 앞두고 얘기한 것처럼, 동물의 입장보다는 동물이 죽은 이후 고통스러워 할 자신의 모습이 두려워 하는 말일 수도 있다. 반면에, 인간의 전문 지식과 경험은 아픈 동물의 미래를 예측한다. 고통에 허덕이는 동물의 미래와 현재를 비교하며 사는 것이 더 나은 지 죽는 것이 나은지 판단한다. 당사자인 동물이 더 살고 싶은지 그만 죽고 싶은지는 결코 알 수 없지만, 인간은 권력자이기에 결정을 대신 내려 준다.
안락사는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는 개별 동물에게만 고려되지 않는다. 이제 현실 세계에서는 동물이 미래에 살아갈 곳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것도 고민의 대상이 되었다 (동물이 받을 신체적 정신적 고통이 미래에 살아갈 또는 살만한 곳이 있느냐 없느냐와 완전 무관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식용 목적으로 농장에서 태어나 평생을 뜬장에서 살아온 도사견을 보자. 그 개는 신체적으로 아프지 않다. 그러나 다음주 그 개가 살던 농장은 개식용 종식법에 따라 문을 닫는다. 이제 그 개에게는 세 가지 미래가 있다. 하나, 이틀 뒤 도살장에서 도살당한다. 둘, 지역 동물 보호소로 이동한다. 그러나 도사견의 국내 입양 가능성은 극도로 낮고 그 때까지는 농장과 다르지 않은 보호소에서 좀 더 살다가 안락사 당한다. 셋, 오늘 저녁 잠자듯 죽는다. 존 롤스의 원초적 입장으로 생각해보자. 당신이 오늘 밤 자고 일어나면 그대로 인간일 수도 있고 농장의 도사견이 될 수도 있다. 다음 날 자신이 될 수도 있는 개의 운명에 대해 결정을 내리고 자야한다면, 당신은 개에게 무슨 미래를 주겠는가?
누군가의 삶에서 미래를 뺏어가는 것. 동물이 미래를 계획하는지 어떤지 모르겠다. 죽음은 가능성을 박탈하는 것이라고 표현되는데, 이 가능성에는 기대하는 가능성과 피하고 싶은 가능성이 있다. 기대해볼 만한 미래가 있다면 고난과 역경도 나름 견뎌볼 만 하겠다. 그러나 삶에서 남아 있는 것이 일제강점기 일본군이 독립투사에게 가하던 전기 고문이 전부라면 죽음이 낫겠다. 오히려 감사한 것이다.
죽이는 것은 나쁜 것인가. 악한 것인가. 의도도 의지도 나쁜 것이 아니라면 죽이는 것은 악한 것이 아닌 것인가. 악한 것이 아니라면 선한 것인가. 죽는 것이 만약 사는 것보다 나은 상황이라면, 다른 존재의 죽음을 대신 결정하는 것은 선의인가. 타인의 고통을 앞에 두고 간섭하지 않는 것은 선한 것인가 악한 것인가. 인간과 동물의 수직적 권력 관계에서 동물의 죽음을 결정하는 것은 착취인가 선의인가. 살아갈 곳이 있는 인간이, 살아갈 곳이 없는 존재의 삶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이 고민 자체도 무척 낯설고 버겁다.
사회에서 수용하지 않는 동물들이 무수히 많다. '사회에서' 라는 말은 인간이 구성한 사회를 말한다. 인간 사회이기 때문에 수용하지 않는 동물들이 생긴다. 실내 동물원이 금지되며 실내 건물에 남겨진 많은 야생 동물, 웅담 채취 목적의 곰 사육이 금지되며 농장에 남겨지는 사육곰, 식용 목적의 개 사육이 금지되며 뜬장에 남겨지는 개들.
이 땅에서 이 동물이 살 곳이 없는가? 인간 사회는 이 동물들에게 돈과 시간과 장소를 내어주기 싫어하는 듯 보인다. 돈과 시간과 장소는 제한된 자원이 맞다. 명확한 것은 동물의 생명과 복지는 인간 사회에서 우선 순위가 아니고 그래서 시간도 남고 돈도 남고 장소도 남을 때 그들의 살 곳이 마련된다. 이들을 돌보고자 하는 의지 또한 몹시 부재한 사회다. 때문에 이 동물들은 갈 곳이 없어 보인다. 갈 곳이 없다는 것은 살 곳이 없다는 말인데, 이들에게 더 나은 미래라는 것은 무엇일까?
안락사는 '회복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 동물들에게 인간이 내리는 인도적 조치이다. "숨을 쉬는데" "눈을 깜빡이는데" "밥을 먹는데" 라는 말은 종종 슬프고 절망적인 인간의 마음이 자포자기로 뱉어내는 울부짖음처럼 들린다. 작가가 브레닌의 죽음을 앞두고 얘기한 것처럼, 동물의 입장보다는 동물이 죽은 이후 고통스러워 할 자신의 모습이 두려워 하는 말일 수도 있다. 반면에, 인간의 전문 지식과 경험은 아픈 동물의 미래를 예측한다. 고통에 허덕이는 동물의 미래와 현재를 비교하며 사는 것이 더 나은 지 죽는 것이 나은지 판단한다. 당사자인 동물이 더 살고 싶은지 그만 죽고 싶은지는 결코 알 수 없지만, 인간은 권력자이기에 결정을 대신 내려 준다.
안락사는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는 개별 동물에게만 고려되지 않는다. 이제 현실 세계에서는 동물이 미래에 살아갈 곳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것도 고민의 대상이 되었다 (동물이 받을 신체적 정신적 고통이 미래에 살아갈 또는 살만한 곳이 있느냐 없느냐와 완전 무관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식용 목적으로 농장에서 태어나 평생을 뜬장에서 살아온 도사견을 보자. 그 개는 신체적으로 아프지 않다. 그러나 다음주 그 개가 살던 농장은 개식용 종식법에 따라 문을 닫는다. 이제 그 개에게는 세 가지 미래가 있다. 하나, 이틀 뒤 도살장에서 도살당한다. 둘, 지역 동물 보호소로 이동한다. 그러나 도사견의 국내 입양 가능성은 극도로 낮고 그 때까지는 농장과 다르지 않은 보호소에서 좀 더 살다가 안락사 당한다. 셋, 오늘 저녁 잠자듯 죽는다. 존 롤스의 원초적 입장으로 생각해보자. 당신이 오늘 밤 자고 일어나면 그대로 인간일 수도 있고 농장의 도사견이 될 수도 있다. 다음 날 자신이 될 수도 있는 개의 운명에 대해 결정을 내리고 자야한다면, 당신은 개에게 무슨 미래를 주겠는가?
누군가의 삶에서 미래를 뺏어가는 것. 동물이 미래를 계획하는지 어떤지 모르겠다. 죽음은 가능성을 박탈하는 것이라고 표현되는데, 이 가능성에는 기대하는 가능성과 피하고 싶은 가능성이 있다. 기대해볼 만한 미래가 있다면 고난과 역경도 나름 견뎌볼 만 하겠다. 그러나 삶에서 남아 있는 것이 일제강점기 일본군이 독립투사에게 가하던 전기 고문이 전부라면 죽음이 낫겠다. 오히려 감사한 것이다.
죽이는 것은 나쁜 것인가. 악한 것인가. 의도도 의지도 나쁜 것이 아니라면 죽이는 것은 악한 것이 아닌 것인가. 악한 것이 아니라면 선한 것인가. 죽는 것이 만약 사는 것보다 나은 상황이라면, 다른 존재의 죽음을 대신 결정하는 것은 선의인가. 타인의 고통을 앞에 두고 간섭하지 않는 것은 선한 것인가 악한 것인가. 인간과 동물의 수직적 권력 관계에서 동물의 죽음을 결정하는 것은 착취인가 선의인가. 살아갈 곳이 있는 인간이, 살아갈 곳이 없는 존재의 삶을 쥐고 흔들 수 있는 이 고민 자체도 무척 낯설고 버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