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의 지혜와 늑대의 지혜를 조화롭게 구현한 각자의 지혜

<철학자와 늑대> - 마크 롤랜즈 독후감

늘보리
2025-08-22 10:14
전체공개
‘인생에 의미가 있을까’를 두고 고민했던 시기를 지나, ‘인생의 의미 없음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를 고민하는 시기를 보내고 있다. 의미 없음이 진실일 때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은 가짜이지만, 좋은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럼 허상에 기대어 살아가는 삶을 좋은 삶이라 할 수 있을까. 어차피 ‘좋음’의 기준도 인간이, 협소한 자기 세계가 만들어낸 산물이다. 좋은 책을 읽고 사람을 만나고 경험을 나누면서 세계가 확장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완벽한 것은 아니다. 어떤 삶도 무해할 수 없으며, 무해한 것이 좋은 것도 아니다. 마크 롤랜즈의 <철학자와 늑대>를 읽으면서 영장류로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삶의 한계를 깨달음과 동시에 늑대의 지혜를 겸비함으로써 무의미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가능성도 보았다. 시간의 덫에 걸린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순간을 살아가는 지혜를 틈틈이 발휘하는 것, 철학자의 지혜와 늑대의 지혜를 삶에서 조화롭게 구현하는 자기 나름의 지혜야말로 개개인의 삶을 고유하게 할 것이다.

#빛나는 행위 동기와 부정당하는 현실

인간의 이성은 인간이 비인간보다 우위에 있음을 입증하는 근거처럼 여겨진다.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란 말에 담긴 ‘짐승’의 속성은 ‘야만성’으로, 최소한의 행동 윤리와 도덕심조차 갖추지 못한 잔혹함, 미개함을 말한다. 자연은 야만적인가? 무엇이 야만인가? 야만은 이성보다 열등한가? 

저자는 반려늑대와 함께 지낸 경험을 돌이키면서 ‘인간성’을 다른 각도에서 돌아보게 한다. 그가 말한 늑대의 삶은 순간 순간에 온전히 주의를 기울이고 만족을 느끼는 방식인데, 이는 에리히 프롬이 제시한 ‘존재론적 삶’과 닮아있다. 인간이 고도의 이성을 그러모아 발견 내지 발명한 철학적 삶을 늑대를 비롯한 비인간은 본능적으로 해내고 있다. 우위가 존재한다면 누가 더 우월한 존재인가. 열등하다고 치부되어온 비인간동물에게서 영장류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아니 배워야 할까.

영장류는 사회적 동물로서 살아가고 생존해야 하기에, 계략과 속임수, 철저한 손익계산을 바탕으로 행동한다. 그 결과 지능이 발달하고 계략과 속임수가 더 교묘해지는 양적강화가 이루어지며 고도의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두뇌가 진화했다. 자기 존재와 세계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성찰하며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고, 이는 여타 동물들보다 인간의 삶이 더 고귀한 듯한 인상을 준다. 저자에 따르면, 고상한 인간 행위의 작동 기제에는 철저한 손익계산이 깔려 있으며, 이는 무리생활을 하는 영장류의 본질적 특성이라고 한다. 우리가 무심코 하는 행동들이, 심지어 ‘선행’마저도 손익계산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니 불편감이 밀려왔다. 동시에 깊숙한 곳에서 해방감도 느껴졌다. 

도덕성은 철저히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지켜지고 그 외의 부분은 교묘하게 은폐된다. 누군가를 해할 의도가 없었다고, 사회구조상 어쩔 수 없다고, 심지어 자연의 섭리이니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면서 도덕적 의무에서 빠져나가려 하지만, 정작 눈 앞의 현실은 보지 못하거나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려 한다.

“우리 인간은 그(상상조차 못할 고통) 밑에 깔린 추악한 모습보다는 화려하게 빛나는 동기에만 주의를 빼앗긴 나머지 세상의 악을 보지 못한다. 이런 식의 주의 분산은 오직 인간만이 하는 직무유기이다. 다양한 형태로 위장한 악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식적, 도덕적 의무 유기가 가면 뒤에 숨어 우리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명백히 아픔과 고통을 초래하고, 그것을 즐기려는 동기에서 비롯된 악은 보기 드문 예외에 불과하다.”(p.136) 

정확히 이 대목을 읽고 공장식 축산 문제를 외면한 과도한 육식 중심의 문화를 떠올렸는데, 곧바로 저자의 채식주의자 선언이 이어져서 반가웠다. 어떻게 비건이 되었느냐는 질문에 공장식 축산 문제를 언급하면 대개는 이런 반응이 이어진다. 사회 구조상 모든 게 연결되어 있어서 어쩔 수 없다고, 육식 문화 안에서 생계를 이어가는 이들이 많고 이들의 삶도 존중되어야 한다고, 먹고 먹히는 게 자연의 섭리라고. 계속해서 ‘화려하게 빛나는 동기’에 대해 말하느라 시야에 가려진 진실–비좁고 더럽고 열악한 축사에서 태어나서 도축되기까지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는 동물들의 처지는 외면한다. 비건이면 도덕적이고 육식을 하면 비도덕적이라는 말이 아니다. 그저 끔찍한 고통 속에 그저 인간에게 섭취될 고기로서 살아가는 동물들의 처지를 외면하지 말자는 거다. 이런 말을 꺼낼 때마다 자꾸만 도덕적 우위에 있는 듯한 상황으로 이어지는 게 스스로도 불편해서 자중했다. 저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행위의 ‘의도’보다는, 다른 생명체들이 처한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멈추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좋은 일도 죄책감이 들기 시작하면 지속가능하지 않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도덕적 존재인 인간에게 ‘죄책감’만큼 행위 동기를 자극하는 것이 있을까. 물론 죄책감은 시작이고, 그 이후에는 다른 이야기와 감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시간적 존재에게 순간적 삶이란

인간은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인과관계로 구성된 시간을 살아가지만, 늑대는 순간 순간을 살아간다. 인간의 시간은 날아가는 화살처럼 일직선으로 진행되지만, 늑대의 시간은 원형으로 순환한다. 자기의 삶을 한 편의 이야기로 이해하라고, 그 안에서 의미를 발견하면 삶이 좀 더 견딜만한 것이 될 거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과거에 겪은 실패가 오늘의 자양분이 되었음을 발견하면, 오늘의 구질구질함도 미래의 나에게 거름이 되겠구나 생각하면 움츠러들었던 마음이 조금은 이완된다. 이것이 지극히 인간적인 해법이라면, 늑대적인 해법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마음을 풀어준다. 지금 이 순간이 영원히 반복될 것처럼 몰입하는 것, 인과관계로 구성된 시간에서, 그 안에서 형성된 ‘진정한 자아’에서 빠져나와 바로 지금 나를 기쁘게 하는 것에 몰입하는 것. (이 대목을 읽을 때 츄르를 꺼냈을 때 보이는 반려냥이들의 반응이 떠올랐다. 그저 웃고 말았는데 저자는 철학적으로 이해하고 배움을 얻다니……)

브레닌의 종양이 악화되었을 때 저자와 브레닌이 상황을 이해하는 방식의 차이를 곱씹게된다. 인간은 의학 지식을 동원해서 아픔의 원인을 파악하고 이를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을 터득했지만, 반대로 병명을 붙이고 자신을 어떤 질병에 걸린 사람으로 규정하면서 순간이 아닌, 시간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 과정에서 질병의 흐름 안에서 좋은 컨디션으로 살아갈 수 있는 무수한 순간들마저 놓치게 된다. 심지어는 병실에 갇혀 남은 생애를 약물치료에 의존하다 죽음을 맞기도 한다. ‘질병’의 자리에 인간의 이성이 만들어낸 산물들을 하나씩 대입해본다. ‘자아’에 갇혀, ‘지식’에 갇혀, ‘삶의 의미’에 갇혀 사랑하는 이들을 챙기지 못하고, 지나가는 이웃에게 인사하지 못하고, 함께 있는 존재에게 온전한 관심과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고. 

나는 누구인가, 아무것도 침해하지 못하는 본질적 자아는 존재하는가. 저자는 단호히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닥난 희망 끝에 남겨진 내 자신이다. 결국 끝에 가서는 시간이 우리의 모든 것을 앗아갈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능력과 성실함과 행운으로 이루어 낸 모든 것들은 결국 다 사라지고 만다. 시간은 우리의 힘, 욕망, 목표, 계획, 미래, 행복과 결국에는 희망까지 앗아갈 것이다. 시간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소유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우리로부터 앗아갈 것이다. 하지만 최고의 순간에 실재하는 내 모습만큼은 시간이 결코 앗아갈 수 없다.” (p. 326)

저자가 말한 최고의 순간, 즉 더 이상의 기대도 희망도 없이 세상에 내던져진 순간을 떠올린다. 내게는 인생에서 그토록 괴롭고 힘든 적은 없었지만, 딱 한 번 그와 비슷한 상황을 예감한 적은 있었다. 2013년 한 달을 잡고 떠났던 그리스 여행 첫날 저녁, 우범지역이라는 숙소 호스트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밤늦게까지 홀로 언덕에 올라 야경을 보고 내려가려던 찰나 날치기를 당했다. 가방에 들어있던 휴대폰과 카메라, 카드와 현금이 든 지갑과 일기장(한글을 읽을 수 없기를…)까지 한순간에 이국의 남자와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내게 남은 건 몇 벌 안 되는 옷짐과 (다행히도) 여권, 이틀치 숙박료 정도 되는 현금뿐이었고, 이걸로 아무 연고도 없는 나라에서 한 달을 살아야 했다. 당장 숙소로 돌아갈 차비도 없었다. 첫 직장을 그만둔 뒤 밀려온 온갖 회의와 실망과 불안을 잘 해결해보자며 떠난 여행이라 여파는 더 컸다. 돌이켜보면 그 여행에서 평소의 나라면 하지 않을 선택들을 많이 했고, 매일매일 얼굴에 새로운 표정이 새겨지는 걸 느꼈다. 몸은 단단해지고 마음은 유연해졌다. 오랜 세월 나를 감싸고 있던 더께에서 벗어난 것마냥 가볍고 경쾌했다. 물론 예기치 못한 상황들이 꾸준히 발생하면서 또 다른 불안과 걱정에 몸서리를 치기도 했지만, 그 외의 순간 느꼈던 나 자신이 무척 편안했다. 

현실로 돌아온 뒤 지금까지도 가끔 아테네의 필로파포스 언덕에서 한밤중에 몸둥이만 덩그러니 남았던 나를 떠올린다. 그때 나는 주변의 사람들을 붙잡고 도와달라고, 방금 내 가방을 들고 어둠 속으로 사라진 남자를 찾아달라고 울부짖었다. 아무나 붙잡고 도와달라고 애원했던 모습이 모든 자기합리화에서 벗어난, 당시 나의 실재라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인생에서 그와 비슷한, 혹은 더한 상황을 겪게 된다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현실을 마주할까. 모든 가식과 허위에서 벗어나 마주하게 될 내 모습은 어떨까. 이 궁금증이 자극하는 두려움과 약간의 기대와 흥분이 삶을 더욱 생기롭게 할 것 같다. 이 질문을 던질 때마다 자연스레 불독에 물려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브레딘이, 그가 낸 담담한 신음도 함께 떠오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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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A동 부사감 | 15일 전
함께 나눌 이야기가 기대되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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