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처럼 현재를 비추는 과거의 소설

2403 시즌 - 책 <프랑켄슈타인(필독) + 프랭키스슈타인 by 지넷 윈터슨(권장)>
오렌지
2024-05-15 16:05
전체공개

 기억은 와전되는 경우가 많다. 한 달 전 친구와 커피를 마시면서 나누었던 일상적인 이야기도 그렇고, 중요한 거래처와 나누었던 큰 금액과 관련한 이야기도 문서로 남겨두지 않으면 후환을 불러올 수 있다. 문서, 사진, 동영상을 동원한 방대한 기록은 의견 충돌과 갈등 해결처럼 사실과 중립을 찾느라 지지부진해질 수 있는 시간을 크게 단축시켰고, 인간이 자신의 목적에 부합하는 전문성을 갖추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도구의 활용성이 한 사람의 시간을 이전 시대의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이 여유 있게 만든 덕분에, 우리는 원한다면 1시간동안 10만, 100만의 사람과 소통하는 것도 가능하게 되었다. 이제는 발전속도를 통제할 수 없는 ai까지 등장한 요즘, 우리가 가장 환멸을 느끼는 것 중 하나는 사기의 위험성, 즉 거짓말이다. 온갖 패러디와 밈이 넘치고 있는 요즘, 밈의 끝을 하나하나 따라가다 보면 만나는 건 십중팔고 광고이다. 기승전결의 기는 미끼이고, 결은 이야기와 관련이 없는 제품 홍보였던 류의 마케팅은 딱히 사기라고 받아들여지지 않을 만큼 일반적이 되었다.

 프랑켄슈타인을 읽고 다룰 수 있는 주제는 다양하게 있겠지만, 내가 꽂힌 건 누군가의 이야기를 그 사람의 말로 오래 들어보고 판단을 내리는 이전 시대의 삶의 양상이었다.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생활하는 나는 너무 많은 사람과, 그렇기 때문에 너무 많은 남이 지겹고 힘들고, 때로는 밉게도 느껴질 때도 있다. 그리고 스마트폰과 인터넷 망을 통하여 끊임없이 약간씩은 연결된 남들에게 쓸 수 있는 시간이 매우 짧다. 필연적으로 피상적인 삶은 잠깐의 브리핑에 좋은 인상을 보여야 하기에 필요 이상으로 신경이 곤두선다. 

 몇백 년 이상 이전의 책을 읽으면 그 시대의 사람들이 사무치게 부러울 때가 있다. 그 시대의 음영을 모르지는 않는다. 삶이라고 부를 만한 삶이 주어진 건 신분제가 공고했던 시대의 윗선에 있었던 소수의 남성과 더욱 소수의 여성 뿐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 기준에선 바보 같은 수준의 의료나 위생 상식을 몰라 사람들이 픽픽 죽어 나갔다는 것을. 하지만 그 우둔한 시기의 사람들이 누렸을 지구는, 지구 탐험을 평생의 업으로 삼고 싶을 만큼 아름답고 광활하며 풍부한 공간이었을 것이다.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 멀리 갈 수 없으며, 지쳐서 일정 이상은 일을 못 하고, 눈 앞에 만날 수 있는 사람에게 기대고, 그래서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절대적으로 많지 않아 소중한 존재일 때, 별 수 없이 사람은 남의 말을 귀담아 듣고, 말을 듣는 태도와 말을 하는 자세에 신경을 썼던 것 같이 보였다. 괴물이 태어나 갈 곳 없이 헤메며 필사적으로 습득하려 한 자질이 듣는 태도와 말하는 자세였던 것처럼. 진실을 다 알 수 없음을 전제로 믿음직한 모습을 갖추는 게 미덕인 세상은 생소한 느낌이었다.

 소설이라 생명을 가질 수 있었던 인공생명(괴물)은 조잡한 결과물이다. 특히 어디를 가도 받아들여질 수 없는 외모를 통해 어설픔이 돋보이며, 인간보다 탁월하게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 기껏해야 큰 체구에서 오는 강한 힘이라는 점이 그렇다. 프랑켄슈타인 박사 또한 개인적인 탐구심을 동력으로 연구를 진행했을 뿐, 특별한 용도를 위하여 괴물을 만든 건 아니었다. ‘이러면 되려나?’하는 생각에 알고 있는 지식을 동원해 포기하지 않고 반복하다가 예상치 못한 결과물을 목도한 것 뿐이었다. 다만 인간이 결과물의 수준은 낮더라도, 세상에 끼칠 수 있는 인간 활동의 파급력의 범위가 감당할 수 없는 스케일일 수 있다는 점을 자각한 느낌이 들어 인상적이었다.

 소설 내에는 법의 사악함을 성토하는 에피소드가 자주 나온다. 언어가 등장한 후 문자가 발명되어, 문자의 세상에서 성립한 법이 인간사와 따로 기능하기 시작해 폐해를 일반인이 인지하기 시작한 시기였고, 곧이어 과학기술이 문자처럼 파장을 감당할 수 없게 된 오늘이 왔다. 현대인의 삶은 목적성이 강하다. 온갖 디지털 도구와 인공지능 시스템을 결합시켜 자신의 뜻을 위하여 맹렬히 사람의 모습은, 멀리서 보면 한 명 한 명이 바느질로 어설프게 조합된 괴물처럼 비대칭적이고 추하게도 보이며, 서로가 서로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결과물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랑켄슈타인은 시종일관 불안에 시달린다. 최초의 SF라는 발상 외에도 불안한 사람의 심리묘사가 탁월하다. 내가 만든 괴물이 날 압박하고 파괴하러 올 것이라는 압박, 내가 괴물을 만든 걸 주변에 들키면 멸시나 처벌을 받을 것이라는 압박, 내가 하는 말을 누구도 믿지 못하리라는 압박까지. 사진도 영상도 없어 말로만 괴물의 존재와 끔찍함에 관해 서술하는 프랑켄슈타인을 보고 있으면 무책임하지만 딱한 면도 있다. 하지만 괴물을 통해 그가 창조해 내고 싶어했던 것은 결국 개인의 한계를 넘어서는 강력함과 무한한 힘에 가까웠을 것이라는 점에서, 심사숙고 없는 과학기술적 결과물이란 디테일하게 제작된 단편적인 욕구에 불과했을지 모른다 느껴지기도 한다. 

 힘의 매력에 사로잡혀 업적을 만들어 낸 프랑켄슈타인은 그 외에 다른 것을 잃었고, 마지막엔 북극을 향하는 선원에게 구조되어 평범한 그 시대의 사람으로서 길고 긴 일대기를 구술하는 구성이 인상적이었다. 

 반면 생명을 창조하고 양육하는 것, 생명의 목적에 관한 가치고민의 중요성에 관해 우리 세상에서 지금보다 자주 이야기되면 좋지 않을까 하는 화두를 받았다. 빛과 어둠의 양면성처럼, 힘의 단면에는 파괴가 있기 때문이었다. 

 소설을 통해 비극의 긴 사건과, 그에 따른 마음의 변화를 순차적으로 따라가면서 프랑켄슈타인이라는 한 사람의 결말을 목격했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착잡함이라는 감정과, 반면교사의 교훈은 이야기로서 허구여도 체화되는 감상이라는 관점에서 진실이다. 고유함이란 관점에서 현대사회가 아무리 많은 도구를 동원해 기록을 남기더라도, 기록의 관점마다 사실관계가 달라지듯 사람을 구성하는 자아는 지극히 주관적일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실시간으로 자료화되는 현실이 누락 중인 건 현재라는 시간과 공간 안에 존재하는 생명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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