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eator 와 Creature 의 이중성에 대해.
심원
2024-05-28 18:21
전체공개
프랑켄슈타인, 현대판 프로메테우스
1. 이름의 의미와 이름짓기의 권력
우리가 흔히 괴물의 이름으로 알고 있던 프랑켄슈타인은 그 괴물을 창조한 과학자의 이름이었다. 그렇다면 그 괴물의 이름은? 그 괴물의 창조자인 프랑켄슈타인이, 묘사할 방법조차 없을 만틈 참담한 존재라고 표현한 그 피조물은 이름도 없이 the creature로 불리운다. (우리 번역본에선 괴물로 번역)
이름짓기는 흔히 권력이라 한다. 창세기에서 아담이 만물의 이름을 짓고 관리하듯.
그러나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피조물에게 이름조차 지어주길 거부하며 철저하게 방기하고 배척한다.
그 피조물은 스스로 지식과 합리성을 갖추었으며 자아의식과 인정욕구를 키우고 모든 인간들이 그러하듯 친절과 연민, 우정을 갈망한다. 그러나 호의를 가진 사람들로부터, 사회로부터, 심지어는 자신을 만든 창조자 프랑켄슈타인 으로 부터도 철저하게 배반을 당하며 끝내는 증오와 악덕만 남은 사악한 존재로 변해간다. 스스로를 결함이 있다 느끼는 그를 깊은 외로움과 고독과 불행 속에 밀어 넣어 노여움에 불타도록 만든 사람은 누구일까? 단지 프랑켄슈타인만의 책임일까?
이 책을 읽으며 가장 공감가는 부분은 이 피조물이 자신의 창조자에게 자신의 그 간의 얘기를 하며 배우자를 하나 만들어 주기를 원하는 그 대목이었다.
사회의 주류에서 벗어나고 쫓겨난 소수자, 주변인, 경계인의 입장과 처지가 이렇지 않을까
민족과 종교의 차이로, 젠더, 외양과 사회적 수준의 차이로 구분하고 차별당하는 수많은 우리 사회의 소수자와 경계인의 처지가 지금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사람들은 차이 때문에 몰락하는가...
그래서 부재를 현대판 프로메테우스라고 지었을까.
그리스 신화에서 인간을 창조했다고 알려진 프로메테우스, 신에게 고분고분하지 않고 속이고 대항하는 인간을 창조한 벌로 인해 끊임없는 고통을 받는 존재. 그 존재의 속성이 프랑켄슈타인과 같은 운명이라 그런 부재를 지었을까
미리 아는자, 먼저 깨닫는자의 뜻을 지닌 프로메테우스라는 부재를 달았던 것은 아마 19세기 이 시기에 너무 이른 인간 창조의 비밀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그 창조작업의 무모함과 예견할 수 없는 결과를 미리 엿보여줬기 때문은 아닐까..
2. 피조물과 창조자의 관계
창조자인 프랑켄슈타인이 인간을 창조했을 때 과연 그는 어떤 피조물을 상상했던 것일까
도대체 어떤 인간을 상상했기에 크리쳐를 보고는 그토록 혐오스러워 하면서 도망을 갔던 것일까
내 마음에 드는 외양과 내가 시키는 일만 하는 혹은 내가 원하는 것까지 알아서 해주는 노예같은 존재, 절대 자의식도 욕망도 가져서는 안되는 기계같은 존재, 완전 통제가 가능한 그런 피조물을 원했던 것일까
그러나 이 크리처(괴물)의 창조자인 프랑켄슈타인 역시도 창조주의 피조물인데 본인은 어떠한가. 신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 인간 창조의 영역을 넘어서 인간을 만들었으며 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살면서 자연을 지배하고 의도적이든 아니든 여성과 낮은 신분의 사람들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지 않은가.
크리처의 서사를 통해 알 수 있듯 스스로 언어와 지식을 배우고 자연의 숭고함과 가족의 소중함, 과학의 경이로움을 깨닫는 존재인 피조물 역시도 창조자와 같은 인격을 가진 존재이다
힘을 통해 상대를 굴복시키고 권력을 이용해 우위를 확립하고자 하는 욕망은 서로에게서 투영이 된 모습이기도 하다. 프랑켄슈타인도 더 크리쳐도 신의 속성과 인간의 속성을 모두 가진 이중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피조물이 자신과 똑같은 의식과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두려워 한 것이 아닐까..
정말 <프랑켄슈타인>의 그 크리처는 자신의 창조자에게 외칠지 모른다. 우리는 똑같다고.
3. 1816년 당시의 상황
데카메론이 쓰여진 배경을 연상케 하는, 비오는 시기의 제네바 호숫가에서 모인 다섯 사람이 서로 무서운 얘기를 들려주다 탄생한 이 소설이 쓰여진 1816년 당시의 상황은, 다윈에게서 촉발된 인간 생명에 대한 자연과학적 상상력과 갈바니에 의한 전기실험으로 죽은 생명을 부활시킬 수 있다는 기대감이 한껏 부풀었던 시대이다. 또 한 계몽주의와 낭만주의가 갈마들며 이성과 경험 중시와 인간의 자유 옹호, 공정, 평등사상이 싹트고 각종 과학 지식을 이용한 새로운 과학실험을 다룬 강의가 인기를 끌던 시기이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사회적 위계는 뚜렷하고 여성에 대한 차별이 당연시 되던 시대.
영국의 작가이자 아나키스트 정치사상가인 윌리엄 골드윈을 아버지로, 여성해방론과 페미니스트의 선구자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를 어머니로, 낭만주의 시인인 퍼시 셸리를 남편으로 둔 저자인 메리 셸리는 당시의 가장 첨단의 학문들을 접하고 경험하고 살았다.
물론 사람은 타고난 존재만이 아니라 그가 처한 사회적 상황의 산물이기도 하다.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시대를 앞서가는 DNA에도 불구하고 여성에겐 금기가 많고 차별이 많았던 당시의 시대를 살아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을 인정하고 함께 얘기가 통하는 유부남과 사랑의 도피를 벌이는 대담함은 이미 갖추고 있던 여성임에도 프랑켄슈타인을 처음 출간할 당시엔 남편의 이름으로 출간할 수 밖에 없었다. 여성 저자이기에.
처음엔 호평이었다가 여성 저자의 글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돌변한 서평만 봐도 당시의 여성에 대한 인정 범위의 한계를 알 수 있다. 당시 메리 셸리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러나 세간에서는 소위 잘 나가는 소설로, 그리고 여러 매체로 변주되며 인기를 얻는다.
세상은 변해가는데 아직도 예전의 권력 체계에 연연해 하는 기득권의 모습이 소설 안팎에서 모두 보이는 듯 하다.
4. 프랭키스슈타인
20세기 중반에 태어난 저자 지넷 윈터슨은 18세기 말에 태어나 19세기 중반까지 살았던 <프랑켄 슈타인>의 저자 메리 셸리에 동화되었던 것일까. 아님 세기가 바뀌었음에도 여전한 시대에 대한 같은 답답함과 우울감을 느꼈을까
도발적이고 대범하면서 우리 시대의
많은 생각거리를 또 한 함께 준 소설이다. ( 이건 따로 정리해야 할 만한 내용과 양이다..)
두 저자의 두 시대가 교차되고 두 소설에 서로 대응되는 인물들이 등장하면서 다른 듯 같은 두 시대에서 조우한다.
현대에는 인간 대신 인공지능이라는 크리쳐를 만들게 되고, <프랑켄슈타인>의 저자인 메리의 대응 인물인, 혹은 괴물의 대응이라고도 볼 수 있는 <프랭키스슈타인>의 주인공은 남자 여자의 이중성을 모두 가진 트랜스휴먼으로 거듭난다.
자신의 진화에 직접 개입하여 자신을 재창조하는. 그래서 자기 몸에 창조자와 피조물의 이중성을 또 한 모두 지니게 된다. 그러나 두 모습을 모두 지닌 소수자로서 갖는 어려움은 여전하다. 그 이중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에너지도 필요하다... 내가 ‘나’로 존재하기 위한 대가.. 단지 자기자신으로 존재하고자 한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폭력을 감수해야 하는..
<프랑켄슈타인>의 크리처의 창조자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에 대응하는 인물인 <프랭키스슈타인>의 빅터가 창조하고자 하는 두뇌만으로 이루어진 인공지능은 어떤 의미일까. 성공하고 나면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처럼 뒤늦은 후회를 하지는 않을까..
마지막에 빅터는 라이에게 고백을 한다. 자신의 안에는 부적처럼 라이의 심장과 라이의 냄새가 남아있음을, 아무리 그 기억과 느낌을 영원토록 저장하고 생생하게 업로딩 시킨다 해도 실리콘 세상에서도 여전히 탄소로 된 인간을 그리워 하는 탄소 인간만의 사랑이 있음을.
<프랭키스슈타인>에서 언급되는, 두뇌 소프트웨어를 장착해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인간이 원하는 여러 용도로 쓰이는 기계인간 사이보그, 마인드 업로딩, 인체냉동 보존술, 인공지능등은 인간이 기계를 이용해서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무엇을 원하는 지가 보인다.
인간만의,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생명 창조의 욕구. 그것도 모든 인간이 아닌 사회의 우위를 점한 권력자와 기득권자만을 뜻하는 인간.
과연 인간의 실체는 무엇일까?
같음을 인정하지 못하고 여전히 자기 중심적인 사고로 구별에 목말라 하며 혐오 때문에 그리고 사랑 때문에 자신과 세계를 파괴하는.
우리는 아직도 여전히 <프랑켄슈타인>의 그 프랑켄슈타인이다.
끝으로 이 작품 <프랭키스슈타인> 에서 공감 가는 이야기들과 생각해볼 만한 내용들을 정리해 본다.
· 자연의 과잉이나 결핍보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우리 생각의 언어
· 과학의 빛은 피에 젖은 심지에서 가장 밝게 타오르는 법이다.
· 이름을 잘 못 붙이는 것은 세상의 불행에 일조하는 것이다. ( 구별, 구분, 예단...)
· 시간은 이미 벌어진 일을 철회해 주지 않는다. 일어난 일은 일어난 것이다.
· 그는 인간은 아니지만 ( <프랑켄슈타인>의 크리쳐도, 인공지능도) 그가 인류에게서 배운 모든 것의 총합.
· 우리는 혐오 때문에 파괴하고 사랑 때문에 또 한 파괴한다.
· 나는 두려움이 없고 따라서 강력하다. ( 니코스카잔챠키스의 묘비명이 생각나는 구절.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무엇도 두렵지 않다. 그래서 나는 자유다.> 원하는 것이 하나도 없고 무엇도 두렵지 않은 자의 강력함. 이런 자를 과연 통제할 수가 있겠는가..)
· 인간은 황폐해져 가는 과거라는 이름의 영예로운 대저택을 가진 부패한 상류층.
· 우리 모두가 무언가를 필요로 해요. 그게 바로 인생이죠.
· 하나님이 우리가 무언가에 손대지 않기를 원하셨다면 우리에게 뇌를 주지 않으셨겠지요.
· 진보가 소수의 사람에게만 혜택을 주고 대다수에게는 고통을 준다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 진보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구절이다. )
· 몸을 벗어나야 인간의 꿈은 완성되요.
몸은 포장재이고 저장고이다. ‘나’는 데이터로 되어 다양한 형태로 다운로드 될 수 있다.
(과연 이런 세상을 꿈꾸는가? 맛있는 음식도 상상으로 음미하고 춤도 머리로 추는 세상..
물론 몸이 노화해가며 뇌도 늙어질 수 있지만 두뇌와 정신도 육체에 의해 강화된다.)
· 삶을 가까이 들여다 보면 원래 불합리한 거예요. ( 불합리한 것이 합리적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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