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을 쌓는 것은 불행으로 가는 길인가?
경비병
2024-05-29 23:59
전체공개
책을 읽고 있던 내 눈을 매번 멈추게 한 메시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지식을 쌓은 것에 대한 후회다. 책에서 수차례 그런 대목이 나오는데 프랑켄슈타인과 괴물의 입에서 나온 몇 개만 꼽아보자.
지식을 얻는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고향을 세상 전부로 알고 사는 사람이야말로 자기 본성이 허락하는 것 이상으로 위대해지려는 열망을 품은 자보다 얼마나 더 행복한지 말입니다.
- 프랑켄슈타인
이러한 생각 때문에 내가 겪은 고뇌는 당신에게 묘사할 수조차 없소. 고뇌를 떨치려 무던히 노력했지만, 아는 것이 늘어갈수록 슬픔을 커졌소. 아, 차라리 원래 살던 숲에서 영원히 살았더라면, 배고픔과 갈증과 열 말고는 아무것도 알거나 느끼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 괴물
아아! 대체 왜 인간은 짐승보다 감수성이 우월하다고 뽐내는 것일까요. 그것 때문에 더 의존적인 존재가 되었을 뿐인데 말입니다. 인간의 충동이 배고픔과 목마름과 성적 욕망에만 있다면 다른 것에 의존할 필요가 거의 없는 자유로운 존재가 될 텐데요. 하지만 인간은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 우연한 말 한 마디나 그 말이 전하는 풍경에도 마음이 움직이는 존재입니다.
- 프랑켄슈타인
그렇다면 지식은 쌓지 않는 편이 좋을까? 그건 아닌 것 같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자연을 더 다방면으로 느낄 수 있다. 다른 이가 세상을 향유하는 방식을 언어로 표현하면 우리는 그 방식을 학습하여 시야가 넓어진다. 대표적으로 시인이 그런 역할을 한다. 감정을 지칭하는 단어를 많이 알수록 감정을 더 세세하게 느낄 수 있다고 한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자신의 생각에 덧붙이고 세상을 해석하는 도구를 하나하나 모아가는 학습이란 쓸모가 있다.
그런데 잠깐? 언어를 아예 몰랐다면? 되돌아가 아까 말한 감정으로 생각해 보자. 감정을 지칭하는 단어를 한 개도 몰랐다면? 오히려 스펙트럼에 구분이 없는 감정들을 모조리 느낄 수 있지 않았을까? 오히려 한 단어라도 알아버렸기에 단어에 내 감각이 갇혀버린건 아닌가? 이미 단어에 갇혀버린 이상 뒤로 무를 수 없으며, 그 뒤에 한 단어씩 알아간다는 것은 박탈 당했던 내 감각을 되찾는 과정인 줄도 모른다.
바로 일어서서 빛나는 형상이 나무들 사이로 솟아오르는 것을 쳐다보았소. 경외감 비슷한 느낌으로 본 것이요. (...) 사방에서는 온갖 향기가 나를 맞아주었소. 그저 환한 달만 알아볼 수 있었다오. 즐거운 마음으로 달만 보았어요. (...) 귀를 반겨주던 즐거운 소리가 날개 달린 작은 동물이 내는 소리였음을 처음 알게 되어 기뻤지요. (..) 때로는 새들의 즐거운 지저귐을 따라 해보았지만 되지 않았어요. (…) 찌르레기와 개똥지빠귀 노래는 달콤하고 매력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소.
위 내용은 괴물이 언어를 배우기 전에 느낀 감상들이다. 정말 우리가 언어를 알고 지식이 있어야만 자연을 깊게 향유할 수 있는가? 현재 지식이 쌓인 우리는 언어를 모르던 괴물보다 자연을 잘 느낄 수 있다고 자부할 수 있는가?
하지만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게 있다. 그것은 바로 괴물이 언어를 배우고난 후에 설명한 감상이라는 것이다. 괴물은 언어를 배우기 전 장면을 머릿속에서 꺼내 언어라는 치아로 잘근잘근 씹어 다시 소화했다. 소의 되새김질 처럼 말이다. 당시의 기억이 ‘빛’, ‘환한 달’, ‘소리’, ‘찌르레기’, ‘개똥지빠귀’, ‘매력’ 이란 단어들로 다시 표현된 이상 기억은 편집되어 머릿속에 저장된다. 괴물이 프랭켄슈타인에게 말을 할 때쯤은, 이미 원본의 기억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인간만이 아닐 것이다. 여우가 언덕에 서서 양쪽을 내려다본다. 한쪽은 삭막한 황야이며 반대는 푸르른 들판이다. 그때 여우는 들판에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리고 거기로 향한다. 그래야 생존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렇다 아름다움조차 진화로 빗어진 감정이라는 이론이 있다. 이 이론이 맞다면 대부분의 동물도 아름다움을 느낄 것이다.
물론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인간만이 아닐 것이다. 여우가 언덕에 서서 양쪽을 내려다본다. 한쪽은 삭막한 황야이며 반대는 푸르른 들판이다. 그때 여우는 들판에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리고 거기로 향한다. 그래야 생존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렇다 아름다움조차 진화로 빗어진 감정이라는 이론이 있다. 이 이론이 맞다면 대부분의 동물도 아름다움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아름다움을 생존 차원에서 분리해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생존 문제와 상관없이 아름다움을 느끼고 그것을 향유하고 표현하고 만들어낸다. 이것들은 지식의 영역이다. 이런 지식들은 우리를 풍요롭게 한다.
자, 그럼 모든 지식이 불행으로 가는 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프랑켄슈타인과 괴물은 왜 그렇게 불행했을까? 먼저 프랑켄슈타인부터 살펴보자.
병근님이 책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했다. 힘을 키우기 위한 책과 힘 자체에 대한 의문을 가지는 책이다. 인공지능 개발자로 생각해 보자면 ‘기술 서적, 자기계발서’ 와 ‘인문학 서적’ 이 될 것이다. 이것을 책이 아닌 지식으로 바꿔도 동일하다. 프랑켄슈타인은 ‘힘을 키우기 위한 지식’에만 광적으로 사로잡혀 있었다. 그간은 자연을 느끼지도 않고 자신이 하는 작업에 대해서 윤리적 고민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식을 쌓는 것 자체가 불행한 것이 아니라. 불균형한 지식이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다. 대게 자신이 균형을 유지하지 않더라도 주위 사람들을 통해서 균형이 유지된다. 그런데 프랑켄슈타인을 어떻게 했는가? 자신을 작업실에 고립시켜 버렸다. 가족의 편지도 받지 않고. 친구도 만나지 않았다. 주위 사람에게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을 미리 말했다면 균형을 잡으려는 압력이 들어왔을 것이다. 세상과 격리되어 치우친 지식을 쌓았기에 불행해져 버린 것이다.
힘을 키우기 위한 지식과 힘에 의문을 가지는 지식을 병행해서 쌓아야 한다. 그런데 이 균형이 한 사람 안에서 이뤄지지 않기도 한다. 프랑켄슈타인이란 존재를 잡아 늘려보면 집단이 될 수도 있고 국가가 될 수도 있다. 집단 속에서 한 사람이 불균형 하더라도 반대쪽으로 불균형한 사람이 있다면 그 집단은 균형이 잡혔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 안에 개별적으로 균형 잡힌 사람이 많다면 양쪽의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집단은 하나의 유기체처럼 많은 대화를 하며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한 사람이 불균형한 지식으로 불행해질 수 있듯이, 집단의 불균형도 전체를 불행하게 할 수 있다. 지금 AI 발전에 양쪽 목소리가 필요한 이유다.
자, 다음, 그럼 괴물을 왜 지식을 쌓음으로써 불행해졌을까?
병근님이 책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했다. 힘을 키우기 위한 책과 힘 자체에 대한 의문을 가지는 책이다. 인공지능 개발자로 생각해 보자면 ‘기술 서적, 자기계발서’ 와 ‘인문학 서적’ 이 될 것이다. 이것을 책이 아닌 지식으로 바꿔도 동일하다. 프랑켄슈타인은 ‘힘을 키우기 위한 지식’에만 광적으로 사로잡혀 있었다. 그간은 자연을 느끼지도 않고 자신이 하는 작업에 대해서 윤리적 고민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식을 쌓는 것 자체가 불행한 것이 아니라. 불균형한 지식이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다. 대게 자신이 균형을 유지하지 않더라도 주위 사람들을 통해서 균형이 유지된다. 그런데 프랑켄슈타인을 어떻게 했는가? 자신을 작업실에 고립시켜 버렸다. 가족의 편지도 받지 않고. 친구도 만나지 않았다. 주위 사람에게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을 미리 말했다면 균형을 잡으려는 압력이 들어왔을 것이다. 세상과 격리되어 치우친 지식을 쌓았기에 불행해져 버린 것이다.
힘을 키우기 위한 지식과 힘에 의문을 가지는 지식을 병행해서 쌓아야 한다. 그런데 이 균형이 한 사람 안에서 이뤄지지 않기도 한다. 프랑켄슈타인이란 존재를 잡아 늘려보면 집단이 될 수도 있고 국가가 될 수도 있다. 집단 속에서 한 사람이 불균형 하더라도 반대쪽으로 불균형한 사람이 있다면 그 집단은 균형이 잡혔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 안에 개별적으로 균형 잡힌 사람이 많다면 양쪽의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집단은 하나의 유기체처럼 많은 대화를 하며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한 사람이 불균형한 지식으로 불행해질 수 있듯이, 집단의 불균형도 전체를 불행하게 할 수 있다. 지금 AI 발전에 양쪽 목소리가 필요한 이유다.
자, 다음, 그럼 괴물을 왜 지식을 쌓음으로써 불행해졌을까?
프랑켄슈타인의 경우는 지식을 쌓아서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괴물은 다르다. 지식을 쌓아서 문제를 만들어내지 않았다. 기존의 문제를 인지했다. 바로 자신의 외모와 인간들이 자신을 멸시하는 이유를.. 그것은 괴물이 지식을 쌓지 않아도 겪을 것들이다. 그런데 지식을 쌓고 나니 미래가 보였다. “이유가 이러니 앞으로도 동일하겠구나” 그리고 그런 고통의 고뇌 속으로 더 깊이 빠져든다. 대부분의 경우는 이런 메타인지에 대한 지식은 유용하다. 그런데 괴물에게는 안좋게 작용했다. 알고도 도저히 해결할 방법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림의 떡이다. 차라리 그림을 보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그렇게 고립되어 점점 더 불행해져갔다. 아까 내가 타인과 교류하면 자연스레 균형을 잡으려는 압력이 생긴다고 말했었다. 이 균형이란 지식보다 포괄적이며 삶 그 자체가 될 수 있다. 그러니 괴물은 삶의 균형을 잃고 점점 진짜 괴물이 되어갔다. 괴물의 고립은 프랑켄슈타인의 고립보다 더 처절하고 잔인하다. 자의가 아닌 타의였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내게 호의적인 감정을 품는다면 나는 그에게 백배 천배로 보답할 거요. 그 한 사람을 위해 인류 전체와도 화해할 생각이 있단 말이오
- 괴물
댓글
첫 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