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긴장'과 '미완'의 미학
늘보리
2024-08-20 22:20
전체공개
부제인 ‘왜 민주주의에서 마음이 중요한가'라는 부제를 보았을 때, 왜 이 시국에 ‘민주주의'일까 잠시 의아해 했다. 유례 없이 다양한 가치들이 터져나오면서 발생하는 갈등을 해결하기에 민주주의는 시대적 소명을 다한 낡은 개념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었다. 민주주의는 거대한 국가 개념과 뗄 수 없고, 기존의 국가 체제로 공동체를 묶어두는 게 좋은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인지, 다른 대안은 없는지 궁금했다. 책을 읽으면서 그간 놓치고 있었던 점을, 소수의, 그러나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미디어 내지 선동가들에 의한 소음으로 묻혀졌거나 희석돼버린 점들을 몇 가지 발견했다.
하나는 민주주의는 다양성을 존중하고 흡수할 수 있는 현존하는 체제 중 가장 이상적이면서 동시에 현실적일 수 있는 체제라는 것이다. 다양한 가치들 간의 충돌로 발생하는 긴장을 끌어안겠다는 마음만 있다면, ‘다수결’이 아니라 ‘합의’에 입각해 ‘타협'이라는 걸 하겠다는 의지를 전제로 소통한다면, 민주주의를 작동케 하는 것이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한 권력화된 정치 층위가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일상에 스며있는 공적 영역의 활성화일 수 있다면, 같은 제도도 충분히 다른 효과를 가능케 하리라는 것이다. 제도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를 작동케 하는 ‘마음'의 부재가 진짜 문제일 수 있는 것이다.
저자는 아무런 갈등 없는 평화 상태와 최종적인 해결책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못박는다. 오히려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할 때 우리는 항상 긴장 상태에 있으며, 하나의 해결책은 그 다음 해결책에 의해 전복되기를 반복한다. 부정적인 느낌을 야기하는 ‘긴장 상태', ‘미완의 해결책'에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한다는 증거’, ‘매우 정상적인 상태’라는 프레임을 씌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긴장을 해결하는 주체가 다수의 시민이 아니라, 극소수의 권력자 내지 선동가이며, 이들에게 막대한 시민적 권리 내지 권력을 내어줌으로써 그 피해를 오롯이 시민들, 특히 사회적 약자들이 떠안고 있음도 자각했다. 정치가 양강 구도의 난투극으로 변질되고, 시민들은 수동적인 관객이 되어 서로 자기 편을 응원(?)하고 상대를 악마화하는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처음부터 그랬다기보다는, 무분별하게 쏟아져 옥석을 가리기조차 힘들어진 뉴스 콘텐츠들, 숏폼 위주의 자극적 콘텐츠 소비, 알고리듬에 의해 반쪽 의견에만 노출되는 현상 등이 반복강화되면서 서서히 능동적이고 비판적인 시민의식이 잠식된 것같다. 팩트 자체도 중요하지만, 다양한 이해 관계를 따져서 합의점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는데 이것이 아예 불가능한 구조가 되어버린 것이다.
저자가 지적한 ‘공적 영역의 활성화'에 주목한다. 영국의 펍처럼 성별, 나이, 계층 등에 상관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마주치고 소통할 수 있는 오프라인 공간들을 되짚어본다. 가장 다양한 존재들과 섞일 수 있었던 공간은 단연 ‘학교’였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인문계, 실업계로 나뉘면서 다양성이 크게 사라졌고, 대학에 가고 직장에 다니면서 점차 전문화되다보니 다양성은 더 크게 줄었다. 특히 중학교에서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어떤 존재들과 더 이상 부대끼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크게 안도하기도 했다. 나와 비슷한 ‘급'의 사람들과만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큰 스트레스 덩어리를 덜어주었다. 다시 생각해보면 문제는 다양한 이들과 함께 있는 것 자체가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다양성 안에서 느끼는 불안과 갈등을 어떻게 접근하고 해결하는지가 교육과정에서 전혀 다뤄지지 않는 것이었다. 저자가 복기한 경험처럼 ‘민주주의'의 의미와 원리, 이론, 역사 등을 글로만 배웠지, 실제 교육현장에 적용하는 법은 방기되었던 것이다. 같은 이유로, 개인적으로 특목고와 자사고와 같은 비평준화 학교들을 청소년기에 도입하는 것에 반대한다. 학생들 수준에 맞게 최고의 배움 환경을 제공한다는 말은, 그저 효율성에만 입각해서 비민주적인 시민을 길러내겠다는 선포와 다름없지 않을까.
공적 영역이 반드시 서로 다른 처지의 사람들이 각잡고 이야기 나누는 공간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도 솔깃했다. 저자에 따르면 공원, 광장, 대중교통, 서점처럼 그저 다양한 인물군상들에 스스로를 노출시키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있다. 물론 회복적 정의에 입각한 ‘써클'처럼 서로의 이야기를 편견이나 판단 없이 경청하고 안전하게 발화할 수 있는 공간이나 이벤트가 있다면 더욱 좋겠지만, 이러한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마음가짐은 일상에서 다양한 이들과 마주치는 경험에서 비롯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은 우리가 일상의 경험들에서 만들어내는 습관이니깐.
개인적으로는, 요즘 꾸려나고 있는 공간에 대한 아이디어와 방향도 잡을 수 있었다. 이 공간의 목적은 다양한 사람들이 공통의 텍스트(책이든 영화든)를 보고 안전하고 솔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이러한 경험이 누적되어 마을운동으로 이어가는 것이었다. 마지막 챕터인 ‘쓰이지 않은 마음의 역사'에서는 내면 대화를 통한 내적 해방에서 사회적으로 이로운 일을 실천할 수 있는 외적 변형으로 나아가는 단계에 대해 언급된다. 바로 ‘더 이상 분리되어 살지 않겠다고 결정하기, 일치의 공동체를 형성하기, 비전을 가지고 공적인 장으로 나아가기, 처벌과 보상 시스템을 변형시키기'이다. 개인적으로는 첫 단계인 ‘더 이상 분리되어 살지 않겠다고 결정하기'에서 ‘일치의 공동체를 형성하기'로 이행하는 단계에 있다고 느꼈다. 초반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어우러지는 공간을 만들고자 했으나 다양한 사람들이 야기하는 긴장과 갈등에 특수한 목적을 추구하는 공간으로 목적을 바꿀까 고민하던 시기였다. 긴장을 끌어안고 부서진 마음이 파괴가 아니라 생명, 창조의 에너지로 발산할 수 있도록 인내하라는 저자의 메시지가 희망으로 다가왔다. 마지막 대목에서 언급한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의 글에서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우리의 생애 안에 성취될 수는 없다"는 단도직입적인 말에 속이 후련해지는 것 같았는데, 조급증을 내려놓아야 희망을 품을 수 있겠다 싶었다.
마지막으로 가장 부담스럽지만 빠져나올 수 없는 공동체, ‘국가'에 대해 고민해보고 싶다. 저자는 미국이라는 국가공동체의 지향점인 생명, 자유, 평등이 미국의 독립 및 건국 신화에 어떻게 녹아 있는지를 짚어본다. 보통의 미국인들이 이러한 가치를 어떻게, 얼마나 느끼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역사적 맥락에서, 독립선언문, 국가, 성조기 등의 상징물들에서 국가공동체가 오랜 세월 동안 무엇을 공유하고 있는지를 내면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건강한 공동체를, 특히 국가처럼 대규모 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일 것이다. 인터넷의 보급으로 이제는 국가에 국한된 시민 개념보다 국경을 뛰어넘어 인류 공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세계시민' 개념이 보다 이상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당장 우리 앞에 놓인 현실적인 문제를 공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적정 규모는 여전히 ‘국가'임을 부정할 수 없다.
저자가 말하는 미국의 건국신화를 들으면서 우리나라가 공유하고 있는 가치는 무엇인지 궁금했다. 애국가, 국기, 단군신화, 독립선언문 같은 상징물들이 떠오르지만, 그래서 우리가 공유하고 합의해낸 가치가 무엇인지 질문하면, 막연하다. 그러다보니 위안부 문제, 강제노역 문제, 광복절 깎아내리기 등 논쟁거리조차 안 되는 것들마저 쉽게 논쟁거리로 전락하는 것 같다. 공유된 가치에 대한 이해가 없으니 각자 자의적인 해석만 늘어놓을 때 이를 하나로 모아줄 상징물이, 가치나 이념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있어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
우리만의 이야기가 없는 것은, 혹은 우리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합의에 이르지 못한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그럼에도 어느새 공공의 적이 되어버린 ‘인터넷'과 ‘소셜미디어'의 기능을 재조명하게 된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가 한 최고의 일은 ‘세계시민' 개념을 우리의 일상으로 끌어온 거라 생각한다. 개별 국가가 아니라, 인류가 함께 쌓아온, 그 이야기들을 통해 어느 정도 합의에 다다른 가치들이 있다. 자유, 평등, 사랑, 존중, 사랑, 관용, 유대, 책임, 연민, 진리 등등 너무나 당연해진 바람에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챙길 수 있게된 가치들… 그리고 조금 더 정신을 바짝 차린다면 이러한 가치들의 증언을 전 세계에서 발견하고 발굴해낼 수 있다. 저자의 말처럼 큰 이야기를 큰 이야기로 내버려두지 않고, 작은 이야기, 즉 우리 자신의 작고 내밀한 이야기와 결합하려는 노력을 그치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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