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회사를 그만뒀다. 온전히 책에 몰입할 시간이 필요했고 그렇게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읽고 쓰면서 보냈다. 고백하자면 그 기간에 돌입하기 전에는 내심 인문학을 사회적 성공의 지름길로 이용하고자 했었다.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 처럼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면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있을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퇴사 바로 다음날 있었던 경상남도 산청 북캠프에서 그 생각이 바로 깨졌다. 차를 타고 산청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도로의 양쪽에는 강원도의 우거진 산들이 펼쳐져 있었다. 그때 병근님이 신나는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산을 보면 초록색이 하나가 아니고 굉장히 다양하지 않나요?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예술가들의 눈에는 더 다채롭게 보일 거예요. 이런 것들 느끼는 사람은 삶을 더 풍요롭게 살 수 있죠. 돈이 많지 않아도요."
"그럼 많은 돈과 명성을 가진 것이 성공한 삶이 아닐 수도 있겠군요?"
"그렇죠. 슬프게도 돈과 명성을 좇다가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요. 그게 더 행복한 삶일까요? 잘 생각해보세요. 단지 돈을 많이 벌고 높은 자리에 있는 건 낮은 차원의 성공일 수 있습니다."
그 대화가 끝나자마자 차는 긴 터널에 진입했고 나 또한 긴 침묵의 터널로 들어갔다. 머릿속에서는 '낮은 차원의 성공'이라는 단어가 요동쳤다. 마치 코끼리가 작은방에 들어와 몸부림 치는 것 처럼 말이다.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각(물건)들은 코끼리 코와 발에 치여 위치가 옮겨지고 떨어져 깨지기도 했다. 그렇다, 인문학을 이용해 더 큰 경제/사회적 성공(바로 그 '낮은 차원의 성공')을 하려고 했던 기존 생각도 그때 부서졌다.
덕분에 그 1년 동안 좀 더 무용한 공부들에 집중할 수 있었다. 에리히 프롬, 조지오웰,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호메로스, 소로, 올더스 헉슬리의 책들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일어나서 잠들기까지 책만 읽었다. 너무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 기간의 중반쯤에는 18편 짜리의 브런치북도 썼다. 이즈음 내가 얼마나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었냐면 경제/사회적 성공과 돈을 어느 정도는 증오할 정도였다.
2023년 8월, 새로운 회사에 입사했다. 다시 사회로 돌아온 것이다. 돈이 다 떨어졌고 커리어를 이어나가야 하니 어쩌겠는가. 마음 같아서는 읽고 쓰는 시간을 더 가지고 싶었다. 그런데 돌아와서 일하다 보니 이게 웬걸 겨우 경제/사회적 성공의 목적에서 떼어냈던 인문학이 내 업무와 커리어(앞으로의 사회적 성공)에 아주 큰 도움이 되고 있는 걸 발견했다. 독서모임의 경험들이 회의에 도움이 됐으며, 글을 썼던 경험이 문서를 작성하고 프로그래밍 언어를 작성하는 것에 도움이 됐고, 글을 읽으면서 기른 근육은 업무 문서를 빠르게 읽고 업무 맥락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됐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단단해진 나의 내면과 마음가짐이 가장 큰 도움이 됐는데,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평을 동료들에게서 많이 받았다. 나도 스스로 내가 성장함을 느낀다. 오히려 1년간 공백 없이 커리어를 달려왔다면 절대 이루지 못했을 그런 성장을 말이다. 업무와 관계없는 책을 주구장창 읽고 성과사회를 비판하는 글을 쓰며 시간을 보냈는데, 이게 왜 내 성과에 도움이 되고 있는 걸까? 무용함의 공부가 결국 유용함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이렇게 경험해버렸다.
이 경험을 한 뒤로는 어떤 책을 읽고, 자연을 보고, 대화하며 시간을 보내도 이게 결국 나의 업무에도 유용하게 작용하리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무용함의 유용함을 이미 알게 된 이후로, 내가 어떻게 "무용한 공부"를 의식적으로 추구할 수 있겠는가? 결국 내게 "유용함"으로 돌아오리란 것을 아는데 말이다. 알면서도 눈 가리고 모른척하라는 것인가?
아니다 아니다...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럼에도 '무용한' 공부를 추구해야 한다. 돌이켜 생각해보자, 내가 경제/사회적 성공을 좇는 '유용한 공부'를 목표로 곧장 직행했다면? 지금의 나의 모습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무용한 공부'를 통해 우회적으로 돌아온 과정에서 오히려 내게 많은 것이 가미됐다. 마치 산길도 곧장 올라가지 않고, 둘러서 간다면 뜻밖의 풍경과 생물들을 만나는 더 넓은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의 나는 성공과 돈만 좇는 사람이 아니게 됐다. 설령 지금 내 업무 능력이 향상됐다고 해도 말이다. 그것은 무용한 배움을 추구하는 중에 덤으로 얻어진 것이다. 이전보다는 사회적 시선이나 기대 돈에 초연해지고 내면이 단단해지고 행복해졌다. 만약 유용함을 목표로 책을 읽어나갔다면 문장 속에서 많은 것을 놓치고, 그런 변화 또한 겪지 못했을 것이다. 직관적으로 성공에 도움이 될 문장들만 머릿속에 들어오거나 내 입맛대로 해석됐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받아들이고 해석한 딱 그만큼만 '낮은 차원의 성공'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책에서는 이런 문장으로 표현한다.
- "지성이 개인의 층위에서든 공적 층위에서든 경제적 이해관계에 완전히 예속될 경우, 지성은 기존의 의제를 바꾸기보단 합리화하는데 쓰이게 된다." / 295p
- "공부의 핵심을 미리 정해놓은 결론에 부합하도록 논리를 꿰어 맞추는 것이 아니라, 답이 정해지지 않은 탐구여야 한다." / 300p
그렇다. 배움에서 얻는 것은 "그 자체로 온전히 독립(259p)"적이어야 한다. 유용함의 잣대로 접근하는 순간 원하는 방향이 설정되게 되고, 나는 절대 나의 안목 이상을 벗어날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아우구스티누스가 마니교를 떠나 기독교로 개종하고 맬컴이 이슬람교로 개종한 것과 같은 자신을 넘어서는 경험은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배움에는 무용함으로 접근해야 한다.
무용한 공부가 유용함으로 돌아온다는 것, 그러나 그러려면 배움을 위한 배움 즉 무용함을 추구해야 한다는(결국 유용함을 앎에도) 역설을 저자는 아래처럼 표현한다.
- "그들은 공부 자체를 위한 공부가(즉 가시적 결과나 명망 높은 자격증이 뒤따르지 않는 공부가) 사실은 다른 목적들의 수단으로 굉장히 유용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 22p
- "공부는 그 찬란한 무용함을 잃어버리면 결코 실용적인 결실을 맺지 못한다." / 295p
나는 앞으로도 배움을 위한 배움을 추구하고 무용한 공부를 하는 자세를 지켜나가야 한다. 일터로 돌아와 무용함의 유용함을 맛본 뒤로 그것을 망각하고 있었다. <찬란하고 무용한 공부> 책을 만난 덕분에 내가 추구해야 할 실체가 명확해졌고, 나를 다잡을 수 있게 됐다.
"산을 보면 초록색이 하나가 아니고 굉장히 다양하지 않나요?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예술가들의 눈에는 더 다채롭게 보일 거예요. 이런 것들 느끼는 사람은 삶을 더 풍요롭게 살 수 있죠. 돈이 많지 않아도요."
"그럼 많은 돈과 명성을 가진 것이 성공한 삶이 아닐 수도 있겠군요?"
"그렇죠. 슬프게도 돈과 명성을 좇다가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요. 그게 더 행복한 삶일까요? 잘 생각해보세요. 단지 돈을 많이 벌고 높은 자리에 있는 건 낮은 차원의 성공일 수 있습니다."
그 대화가 끝나자마자 차는 긴 터널에 진입했고 나 또한 긴 침묵의 터널로 들어갔다. 머릿속에서는 '낮은 차원의 성공'이라는 단어가 요동쳤다. 마치 코끼리가 작은방에 들어와 몸부림 치는 것 처럼 말이다.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각(물건)들은 코끼리 코와 발에 치여 위치가 옮겨지고 떨어져 깨지기도 했다. 그렇다, 인문학을 이용해 더 큰 경제/사회적 성공(바로 그 '낮은 차원의 성공')을 하려고 했던 기존 생각도 그때 부서졌다.
덕분에 그 1년 동안 좀 더 무용한 공부들에 집중할 수 있었다. 에리히 프롬, 조지오웰,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호메로스, 소로, 올더스 헉슬리의 책들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일어나서 잠들기까지 책만 읽었다. 너무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 기간의 중반쯤에는 18편 짜리의 브런치북도 썼다. 이즈음 내가 얼마나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었냐면 경제/사회적 성공과 돈을 어느 정도는 증오할 정도였다.
2023년 8월, 새로운 회사에 입사했다. 다시 사회로 돌아온 것이다. 돈이 다 떨어졌고 커리어를 이어나가야 하니 어쩌겠는가. 마음 같아서는 읽고 쓰는 시간을 더 가지고 싶었다. 그런데 돌아와서 일하다 보니 이게 웬걸 겨우 경제/사회적 성공의 목적에서 떼어냈던 인문학이 내 업무와 커리어(앞으로의 사회적 성공)에 아주 큰 도움이 되고 있는 걸 발견했다. 독서모임의 경험들이 회의에 도움이 됐으며, 글을 썼던 경험이 문서를 작성하고 프로그래밍 언어를 작성하는 것에 도움이 됐고, 글을 읽으면서 기른 근육은 업무 문서를 빠르게 읽고 업무 맥락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됐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단단해진 나의 내면과 마음가짐이 가장 큰 도움이 됐는데,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평을 동료들에게서 많이 받았다. 나도 스스로 내가 성장함을 느낀다. 오히려 1년간 공백 없이 커리어를 달려왔다면 절대 이루지 못했을 그런 성장을 말이다. 업무와 관계없는 책을 주구장창 읽고 성과사회를 비판하는 글을 쓰며 시간을 보냈는데, 이게 왜 내 성과에 도움이 되고 있는 걸까? 무용함의 공부가 결국 유용함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이렇게 경험해버렸다.
이 경험을 한 뒤로는 어떤 책을 읽고, 자연을 보고, 대화하며 시간을 보내도 이게 결국 나의 업무에도 유용하게 작용하리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무용함의 유용함을 이미 알게 된 이후로, 내가 어떻게 "무용한 공부"를 의식적으로 추구할 수 있겠는가? 결국 내게 "유용함"으로 돌아오리란 것을 아는데 말이다. 알면서도 눈 가리고 모른척하라는 것인가?
아니다 아니다...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럼에도 '무용한' 공부를 추구해야 한다. 돌이켜 생각해보자, 내가 경제/사회적 성공을 좇는 '유용한 공부'를 목표로 곧장 직행했다면? 지금의 나의 모습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무용한 공부'를 통해 우회적으로 돌아온 과정에서 오히려 내게 많은 것이 가미됐다. 마치 산길도 곧장 올라가지 않고, 둘러서 간다면 뜻밖의 풍경과 생물들을 만나는 더 넓은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의 나는 성공과 돈만 좇는 사람이 아니게 됐다. 설령 지금 내 업무 능력이 향상됐다고 해도 말이다. 그것은 무용한 배움을 추구하는 중에 덤으로 얻어진 것이다. 이전보다는 사회적 시선이나 기대 돈에 초연해지고 내면이 단단해지고 행복해졌다. 만약 유용함을 목표로 책을 읽어나갔다면 문장 속에서 많은 것을 놓치고, 그런 변화 또한 겪지 못했을 것이다. 직관적으로 성공에 도움이 될 문장들만 머릿속에 들어오거나 내 입맛대로 해석됐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받아들이고 해석한 딱 그만큼만 '낮은 차원의 성공'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책에서는 이런 문장으로 표현한다.
- "지성이 개인의 층위에서든 공적 층위에서든 경제적 이해관계에 완전히 예속될 경우, 지성은 기존의 의제를 바꾸기보단 합리화하는데 쓰이게 된다." / 295p
- "공부의 핵심을 미리 정해놓은 결론에 부합하도록 논리를 꿰어 맞추는 것이 아니라, 답이 정해지지 않은 탐구여야 한다." / 300p
그렇다. 배움에서 얻는 것은 "그 자체로 온전히 독립(259p)"적이어야 한다. 유용함의 잣대로 접근하는 순간 원하는 방향이 설정되게 되고, 나는 절대 나의 안목 이상을 벗어날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아우구스티누스가 마니교를 떠나 기독교로 개종하고 맬컴이 이슬람교로 개종한 것과 같은 자신을 넘어서는 경험은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배움에는 무용함으로 접근해야 한다.
무용한 공부가 유용함으로 돌아온다는 것, 그러나 그러려면 배움을 위한 배움 즉 무용함을 추구해야 한다는(결국 유용함을 앎에도) 역설을 저자는 아래처럼 표현한다.
- "그들은 공부 자체를 위한 공부가(즉 가시적 결과나 명망 높은 자격증이 뒤따르지 않는 공부가) 사실은 다른 목적들의 수단으로 굉장히 유용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 22p
- "공부는 그 찬란한 무용함을 잃어버리면 결코 실용적인 결실을 맺지 못한다." / 295p
나는 앞으로도 배움을 위한 배움을 추구하고 무용한 공부를 하는 자세를 지켜나가야 한다. 일터로 돌아와 무용함의 유용함을 맛본 뒤로 그것을 망각하고 있었다. <찬란하고 무용한 공부> 책을 만난 덕분에 내가 추구해야 할 실체가 명확해졌고, 나를 다잡을 수 있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