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하고 무용한 공부>의 저자 제나 히츠의 책을 덮으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녀는 올해 몇 살일까? 나보다 많을까 적을까?'였다. 책의 프롤로그에서 '책을 몸소 살아내기'라고 말해도 좋을 그녀의 이력 중, '스위스의 한 수녀공동체'와 3년을 살았다는 캐나다 동부 온타리오주에 있는 '마돈나하우스 종교 공동체'라는 장소가 내겐 범상치 않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공부 그 자체로 가치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준 좋은 부모님과 대학에서 박사학위까지 받고 유명대학에서 교수로서 보장된 삶을 살던 그녀의 생각을 전환해 준 장소가 공교롭게도 올해 그것도 얼마 전에 내가 다녀 온 두 나라에 있는 곳이다. 물론 저자와는 딴판으로 스위스에서는 알프스와 유명한 호수 트래킹을, 캐나다에서는 마돈나하우스(구글맵에 나옴)를 지나쳐 알공킨 공원에서는 여유롭고 풍요로운 단풍의 나라를 즐겼다. 하지만 진정한 배움을 사회적 맥락에서 찾고자 했던 작가의 여정처럼 대단하지는 않았지만 내게도 나름 먼 나라 여행의 이유와 목적은 분명 있었다.
누구는 인생의 시작이라고하고, 누구는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에서 내려오라고 하는 환갑이라는 나이를 축하(?)도 하고 살아온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삶의 꾸림을 준비해보자 했던 시간이었다. 물론 작가와는 달리 나는 문득문득 올라오는 인생에 대한 여러 가지 사색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얻어낼 수는 없었다. 물론 그곳을 찾은 동기가 작가만큼 치열하지 못한 당연한 결과라고 위안을 해보기도 하지만 정말로 다행스럽게도 나는 이책을 통해 내게 남은 인생의 방향에 대한 실마리를 조금은 찾은 것 같다. 그것은 배움을 향한 지적인 삶의 유용성과 방향성에 대한 내 이해의 폭과 깊이가 조금은 넓어졌음을 감각하게 되었다고 말하겠다.
돌아보면 나는 여태 치열하고 유용한 공부를 해온 결과로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사회적, 경제적인 내가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게도 많은 순간 찬란하고 무용한 공부에도 흥미가 있었고 실제로 그 과정에서 유용함과는 아무 상관없는 차오르는 기쁨이 있었음도 또렷이 기억한다. 그런 면에서 배움에 대한 사랑은 우리가 지닌 인간성의 근본 요소라고 한 작가의 말에 완전 동의한다.
인생의 가을쯤에 있는 내게 특별히 가깝게 다가왔던 내용은 '여가'와 '관조'였다. 내면의 공간을 가지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이해하고 음미하기 위해 자유로운 시간, 자연과의 교감, 정신의 비움 등의 필요를 얘기한 부분은 어쩌면 내게도 가능할 것으로 보이는 남은 인생의 방향을 알려주었다고 할 수 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맨 처음 추천의 말에 있던 '요약하면 다섯 쪽밖에 안 될 주장을 설계하고 500쪽 분량의 사례로 나머지를 채워 505쪽짜리 책에 댄 사람은 손들라!'라고 했던 구절이 떠오른다. 나는 내가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 배움과 공부에 대하여 멀게는 기원전에서부터 20세기까지 살았던 사람들의 300쪽이 넘는 사례로 다시 돌아보게 해 준 저자의 주장에 마음을 홀라당 데었다고, 전혀 질리지 않았다고 두 손을 들어 말하고 싶다.
사실 내게도 작가가 말한 그 자체로 가치있는 삶의 목적이 되는 지적인 삶의 형태를 살아간 가까운 사람이 떠오르고, 우리 조상들 중에서도 같이 얘기하고 싶은 사람도 있다. 이것은 내가 북클럽 오리진 오프라인 모임이 기대되는 이유이기도하다.
배움 자체는 내향적이어서 세상에서 물러났으며 개인의 존엄을 드러내고 인류의 마음과 교감한다는 저자의 말을 따르며 살아보고자 한다. 믈론 배움은 언제나 역경이라는 학교에서 이루어진다고 했으니 여러 가지 핑계와 게으름 등으로 난관은 뻔히 예상이 된다. 하지만 진지함의 미덕을 찾아 부단히 움직여 보고자 한다. 그래서 진리 안에서 기뻐하는 행복을 찾아 보기로 마음 먹어 본다.
공부 그 자체로 가치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준 좋은 부모님과 대학에서 박사학위까지 받고 유명대학에서 교수로서 보장된 삶을 살던 그녀의 생각을 전환해 준 장소가 공교롭게도 올해 그것도 얼마 전에 내가 다녀 온 두 나라에 있는 곳이다. 물론 저자와는 딴판으로 스위스에서는 알프스와 유명한 호수 트래킹을, 캐나다에서는 마돈나하우스(구글맵에 나옴)를 지나쳐 알공킨 공원에서는 여유롭고 풍요로운 단풍의 나라를 즐겼다. 하지만 진정한 배움을 사회적 맥락에서 찾고자 했던 작가의 여정처럼 대단하지는 않았지만 내게도 나름 먼 나라 여행의 이유와 목적은 분명 있었다.
누구는 인생의 시작이라고하고, 누구는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에서 내려오라고 하는 환갑이라는 나이를 축하(?)도 하고 살아온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삶의 꾸림을 준비해보자 했던 시간이었다. 물론 작가와는 달리 나는 문득문득 올라오는 인생에 대한 여러 가지 사색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얻어낼 수는 없었다. 물론 그곳을 찾은 동기가 작가만큼 치열하지 못한 당연한 결과라고 위안을 해보기도 하지만 정말로 다행스럽게도 나는 이책을 통해 내게 남은 인생의 방향에 대한 실마리를 조금은 찾은 것 같다. 그것은 배움을 향한 지적인 삶의 유용성과 방향성에 대한 내 이해의 폭과 깊이가 조금은 넓어졌음을 감각하게 되었다고 말하겠다.
돌아보면 나는 여태 치열하고 유용한 공부를 해온 결과로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사회적, 경제적인 내가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게도 많은 순간 찬란하고 무용한 공부에도 흥미가 있었고 실제로 그 과정에서 유용함과는 아무 상관없는 차오르는 기쁨이 있었음도 또렷이 기억한다. 그런 면에서 배움에 대한 사랑은 우리가 지닌 인간성의 근본 요소라고 한 작가의 말에 완전 동의한다.
인생의 가을쯤에 있는 내게 특별히 가깝게 다가왔던 내용은 '여가'와 '관조'였다. 내면의 공간을 가지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이해하고 음미하기 위해 자유로운 시간, 자연과의 교감, 정신의 비움 등의 필요를 얘기한 부분은 어쩌면 내게도 가능할 것으로 보이는 남은 인생의 방향을 알려주었다고 할 수 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맨 처음 추천의 말에 있던 '요약하면 다섯 쪽밖에 안 될 주장을 설계하고 500쪽 분량의 사례로 나머지를 채워 505쪽짜리 책에 댄 사람은 손들라!'라고 했던 구절이 떠오른다. 나는 내가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 배움과 공부에 대하여 멀게는 기원전에서부터 20세기까지 살았던 사람들의 300쪽이 넘는 사례로 다시 돌아보게 해 준 저자의 주장에 마음을 홀라당 데었다고, 전혀 질리지 않았다고 두 손을 들어 말하고 싶다.
사실 내게도 작가가 말한 그 자체로 가치있는 삶의 목적이 되는 지적인 삶의 형태를 살아간 가까운 사람이 떠오르고, 우리 조상들 중에서도 같이 얘기하고 싶은 사람도 있다. 이것은 내가 북클럽 오리진 오프라인 모임이 기대되는 이유이기도하다.
배움 자체는 내향적이어서 세상에서 물러났으며 개인의 존엄을 드러내고 인류의 마음과 교감한다는 저자의 말을 따르며 살아보고자 한다. 믈론 배움은 언제나 역경이라는 학교에서 이루어진다고 했으니 여러 가지 핑계와 게으름 등으로 난관은 뻔히 예상이 된다. 하지만 진지함의 미덕을 찾아 부단히 움직여 보고자 한다. 그래서 진리 안에서 기뻐하는 행복을 찾아 보기로 마음 먹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