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지랑이

<월든> - 헨리 데이비드 소로 독후감

콩알놔 프로필 콩알놔
2026-03-20 16:12 (수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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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명절을 앞두고 나름의 계획을 세웠다. 언제고 여유시간이 생긴다면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어두었던 일들을 해야지. 밀린 독서를 해야지. 밀린 일기를 써야지. 영어 공부를 해야지. 그리고 명절 마지막 날, 친구와 카페에 마주보고 앉은 나는 눈물을 머금고 이렇게 말했다.

"이사 갈 집에 가구 뭐 둘지 고민하느라 지난 며칠 내내 당근마켓만 봤다!"

"아이고... 가구는 집에서 계속 쓰는 거잖아. 괜찮아..."

애초에 집에 무언가를 많이 두는 편도 아니다. 이따금 집에 손님이 오면 다들 너 집에 뭐가 없네 했다. 보일러를 고치러 온 집주인은 색시가 아직 없어서 집이 휑하네 했다. 다음 세입자는 집 계약 전, 집을 아주 깨끗하게 쓰셨네요, 만족 했다. 쓸 것만 있으면 되지, 굳이 뭐가 더 필요한가? 나는 늘어가는 책도 바닥에 쌓아만두다, 먼지가 쌓이자 택배 박스 한쪽을 오려내고 옆으로 눕혀 책장으로 썼다. 실용적인게 중요하지 뭐. 이게 내 마음가짐이었는데,

돈을 조금 모아둔 게 독이 됐을까? 예쁘고 비싼 게 어딘지 모르게 더 실용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전보다 큰 평수의 집으로 이사가며 이전의 내 가구로는 감히 공간을 채울 수 없었고 나는 새로운 가구를 들여 공간을 채우고 싶어졌다. 새로운 것. 예쁜 것. 손님들을 불러와 거실에 앉아 얘기하는 상상을 했다. 친구들이 이 식탁 어디서 샀는지 묻는다. 드르륵 미닫이 문을 열고 내 작업실을 구경한다. 이 책상은 어디서 샀는지 묻는다. 책상을 손바닥으로 훑고 책장을 지나 수납장으로 향하며 디자인이 고풍스럽다고 얘기한다. 되게 느낌 있게 인테리어 잘 해놨다고 친구들이 부러워한다. 나는 내심 뿌듯하고 그들이 하루 자고 가며 내 집을 더 가치있게 느껴주길 바라는, 상상을 한다.

그 상상 속의 집은 묵직한 원목 가구를 중심으로 미드센츄리 수납장, 헤드가 위로도 옆으로도 아래로도 뻗는 스탠드 조명 (방마다 조도가 조금씩 다른 이 조명들은 눈이 부시지도 침침하지도 않다), 그리고 거실과 베란다는 이파리가 부드럽게 화분을 타고 흘러내리는 다양한 식물들이 공간을 채우고 있다. 바닥에 깔린 카페트와 새로운 시트지가 붙은 주방의 색감은 pinterest의 감성을 모셔왔다.

아아 그만!

설 명절 마지막 날 나는 머리를 앞뒤로 벅벅 긁으며 이제 제발 그만하자 소리친다. 며칠 후 나는 이삿짐 차를 타고 새로운 집으로 향했다. 출렁거리는 배를, 아니 차를 타고 새로운 항해를 시작했다. 새 섬으로, 아니 집으로 가는 항해가 심상치 않다. 트럭이 출렁 거릴 때마다 사고 싶은 책상 하나가 찰싹, 옆통수를, 사고 싶은 의자 하나가 찰싹, 뒷통수를 쳤다.

이후로도 며칠의 휴가를, 며칠의 주말을 지냈지만 새 집에는 아직 제 자리를 찾지 못한 물건들의 비통함이 바닥에 흥건하다. 이 빈 집에 옷장 이천삼백개, 책상 육천칠백개, 식탁 오천구십칠개가 영혼처럼 들어왔다 스르르 사라졌다.

내가 추구하는 삶과 나는 너무나 다른걸까. 나는 애초에 조용하고 얌전하고 소박한 삶을 살아낼 수 있는 인물은 아닌걸까. 글을 쓸 때 거슬릴만큼 덜컹거리지만 않으면, 작업할 때 너무 좁지만 않으면 책상은 그만인것을. 밥 먹을 때 먼지 풀풀 날리지만 않으면, 밥그릇 국그릇 반찬 그릇 몇 개 놓을 수 있는 식탁이면 족할 것을, 나는 있지도 않은 미적 감각을, 오지도 않을 손님들을 상상속에서 끄집어내어다가 나를 괴롭힌다.

고민하느라 보낸 시간을 시급으로 계산하면 이미 이 집에는 럭셔리 가구가 두 세개즘 들어와 있다. 나는 오늘까지만, (아니 주말까지만) 당근과 오늘의집과 29cm를 둘러보고 이제 정말 그만하자고 결심한다. 소로의 삶으로 빠져들 준비를 한다. 비싸고 느낌 좋은 책상과 의자 위에서. 아아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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