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과 고립, 타인과 세계에 대한 개방에 대하여.

<월든> - 헨리 데이비드 소로 독후감

propers 프로필 propers
2026-03-26 18:13
전체공개
 『월든』이라는 책 이야기를 들었을 때, 호숫가 나무 위에 지어진 트리하우스를 떠올렸다. 호숫가에 나무집을 짓고 사람들 사이를 떠나 은둔자처럼 사색하는 사람, 일상적인 삶과 유리되어 관조하는 삶을 사는 사람, 거의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수도자처럼 고행하는 사람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혼자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였는데 누이와 엄마가 도와 주기도 했다는 말을 얼핏 듣고 불안하기도 했다.(왜 불안했냐고요? 고상하게 수행하는 남성 은둔자와 고생하며 서포트하는 여성 가족들)
실제로 이 책은 그렇지 않았다. 1장은 ‘생활 경제’로 시작하고 있었고 저자는 생계를 내팽개친 사람이 아니었다. 경제 관념이 확실해서 좋았다. 
82-83페이지. 
나의 통계 수치 작업을 계속해보자 … 총계 36달러 78센트. 
84페이지. 
이런 지출로 나는 여유와 독립적 생활과 건강을 확보했을 뿐만 아니라 내가 있고 싶은 만큼 있어도 되는 안락한 집을 얻었다. 
그 이후 이어지는 챕터에서도 집 짓는 노동, 콩 농사의 노동, 방문객들과 마을 사람들, 숲 속 소리와 호수 밑바닥의 물고기까지 피상적이지 않은, 손에 잡히는 구체성을 지니고 있었다. 또 단순 소박하게 살고자 하는 자신의 신념이 실제로 얼마의 생활비를 필요로 하는지 현실적으로 삶을 실험하고 있었는데, 미니멀라이프가 나의 꿈이기도 하고, 이를 위해 ‘실험’을 할 생각을 갖고 있어 동질감을 느끼기도 했다. (나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살림살이 개수, 최소한의 생활비가 얼마인지 헤아리고 싶은 것이 나의 오랜 꿈이다.)
무엇보다 이 책에서 내가 느낀 것은, 그가 고립되어 있지 않고 부정적인 의미의 고독에 쌓여 있지 않고 자신을 자연과 사람들과 세계에 개방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모든 챕터에서 그의 ‘개방성’을 읽을 수 있었다. 
챕터3. 독서: 과거의 고전들에 대한 개방
챕터4. 숲속의 소리: 자연(나뭇가지, 새, 동물들, 눈), 문명(기차)에 대한 개방
챕터6. 방문객들: 나무꾼 등의 방문자에 대한 개방
챕터7. 콩밭: 자라나는 콩, 노동하는 자신, 콩을 키우는 자연, 콩 농사를 방해하는 우드척에 대한 개방 
챕터8. 마을: 마을 사람들과 마을 자체에 대한 개방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개방성’은 한나 아렌트가 말한 ‘개방성’의 개념을 참고했다. 자아를 고집하지 않고 타자의 개별성과 고유성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태도, 타자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는 태도를 말한다. (최대환 신부님의 한나 아렌트 관련 강의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kS2i1ralQR0
https://www.youtube.com/watch?v=ZNwi1fakADk)
 
그는 혼자 있지만 외롭지 않다. 자연 때문 만은 아니다. 방문객도 있었고 스스로 마을도 자주 내려갔다. 사람을 밀접하게 자주 만나지 않았던 것이지 사람을 피한 것은 아니다. 자연에만 기대고 사람을 포기한 것도 아니다. ‘나는 사람이 싫어’라고 말하며 강아지 고양이에게 과한 애정을 표하는 사회성 없는 사람들의 변명과도 다르다. 그는 물러나 있지만 숨어 있지 않다. 
183페이지. 
 인간의 가치는 그의 피부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우리가 상대방을 자주 만나 접촉할 필요는 없다. 
185페이지.
하느님은 혼자이지만 악마는 결코 혼자 있지 않다.
 
 나는 … 4월의 비, 1월의 해방, 새 집에 나타난 첫 번째 거미처럼 외롭지 않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세계에 자신을 개방하고 외롭지 않은 저자가 지금의 공격적 은둔형 외톨이들과 대조적으로 보인다. 고립된 개인들은 같은 인터넷 커뮤니티에 모여 끊임없이 말을 하고 있지만 서로를 다른 개별자로 인지하지 않고 동일한 인간으로 보고 있다.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생각도 없고,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을 만날 여지도 거의 없다. 근거 없는 확신들이 더 강화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행동도 이루어 낼 수 없다는 데 무력감을 느낀다. 그러다가 어쩌다 나타나는 행동이 폭력이다. 들을 귀가 없는 자들에게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건너 건너 아는 친구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거의 5년 가까이 집 안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는 은둔형 외톨이로 지낸다고 한다. 5년이 흘렀는데 언제 끝이 날 수 있을까? 나 역시 15년을 같은 회사에 머물렀다. 다른 사람이 결정해 주지 않았다면 내 발로 나오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나 역시 정체되어 있지 않았다고 말 할 수 없다. 나 역시 내가 알고 있는 사람,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 ‘맞아 맞아’ 박수를 치며 알고 보면 또 다른 ‘나’들만 만나고 있었는지 모른다. 책이 사람을 찾아오는가 보다. 갑자기 3월에 월든이 찾아왔다. 정체되어 있지 않기 위한 몸부림. 나와 다른 사람들과 관계 맺기. 낯선 사람의 뜻밖의 의견을 듣는 것. 비타 악티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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