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이 이어지는 시간

<할매> - 황석영 독후감

호떡 프로필 호떡
2026-05-21 22:18
전체공개
이 책을 읽는 동안 시간의 감각이 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특별히 의식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일생을 주된 관점으로 시간을 의식할 것 같다. 이를테면, 나의 인생, 나의 하루, 내가 겪는 시간, 앞으로 살아갈 시간 같은 것이다. 그게 시간을 인식하는 자연스러운 의식의 흐름일 텐데, 할매를 읽다 보면 한 사람의 생애가 아닌 600년이 타임랩스처럼 속도감 있게 흘러가는 시공간 한가운데 있는 느낌을 받게 된다. 개별적인 생명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것 같으면서도 그보다 더 넓은 범위의 순환되는 어떤 섭리를 지켜보는 느낌이었다. 특정한 인물의 생애나 사람들이 남긴 역사 이전부터 그곳에 있었고, 이어져 온 모든 생명체의 순환고리가 여태껏 흘러가고 있는 듯하다. 우리가 보통 인식하는 시간의 개념보다 훨씬 더 넓고 빠르게 흐르는 거대한 시간을 구경하며 지나온 것처럼 느껴졌다.

이 책의 중심에는 600년 된 팽나무가 있는데 긴 시간을 한자리에 살아온 영험한 나무조차 시작은 작은 새 한 마리의 죽음이었다. 그 이후로도 팽나무 주변에서 수많은 생명체가 태어나고 살아가고 죽기를 순환하듯 반복하며, 생과 사가 단편적인 사건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생명과 지나간 생명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초반에 이런 흐름을 쭉 이어가는데 왠지 모를 위로 같은 게 느껴지기도 했다. 너무 큰 시간과 흐름을 보다 내 삶을 돌아보니 비교적 별거 아닌 듯하고, 큰 시스템 안에서 발생한 작은 에피소드 같은 느낌이 들었다. 크게 생각했던 것이 순식간에 작아졌달까. 자연의 긴 시간 속에서 모든 게 돌고 돌며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어지는게, 나 스스로를 작게 만들면서도 외롭지 않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실제 역사적 사건들을 모티브로 한 듯한 여러 사람들의 여러 사건이 지나가기도 하는데, 지역 방언이나 낯선 단어가 많아서 모든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이 주는 삶의 느낌은 분명하게 다가왔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 시대를 살면서 여전히 먹고살고, 믿고, 버티고, 사랑하고 때로는 억울하게 죽는다. 거창한 영웅담이 아님에도 오히려 더 생동감이 있고 인간적이고,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수백 년 전 사람의 인생이 어쩜 이렇게 이질감 없고 쉽게 공감이 될까 신기하여 흥미롭게 읽었다.

특정한 역사나 사건보다는 자연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에 대해 호기심과 신비로움을 느끼는 감상이 많았다.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동물들의 삶도 단순히 누가 나쁘고 좋은 놈이라 할 거 없이 그저 먹고 먹히고 사라지고 다시 태어난다. 그런 지극히 중립적이면서도 거침없이 흘러가는 자연이 뭐랄까 거대하면서도 소속감 비슷한 편안함을 느끼게 했다. 모든 존재가 모든 시공간에 걸쳐 연결되어 있다는 것과 그런 세계가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다는 생각에 상당히 깊은 인상을 받았다. 

자연 앞에서 누군가의 인생은 덧없게 느껴질 수 있겠다. 하지만 생명의 릴레이에 참여하는 구성원이라 생각하면 그 안에서 또 다른 삶의 의미가 존재함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거 같다. 한 사람의 삶은 허무하지만, 자연의 역사 속에서 공평하게 한 부분을 이루었고, 사라지며 다시 다른 어딘가로 흡수되는 이 거대한 메커니즘은 생명과 역사와 자연이 함께 흘러가는 거대한 시간의 개념을 상기하게 해주었다. 그 거대한 흐름 속에서 나 역시 태어나고 죽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작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경쟁과 존재 가치를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이 시대의 한켠에서 조용한 위로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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