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 경쟁을 당연시하는 사고 습관

더듬이 프로필 더듬이
2026-07-05 12:15
지난달에 함께 읽고 이야기한 <스피노자의 거미>와 궤를 같이하는 신간의 리뷰를 읽었다.
우리는 '경쟁'을 당연시한다. 그것이 '자연'이고 '숙명'이라고 여긴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경쟁을 자연의 지배적 질서로 보는 관점은 어떤 시기(특히 유럽에서 팽창하기 시작한 제국주의 시대) 그런 논리가 자신들에게 이득이라고 여긴 자들이 반기며 퍼뜨린 일면적 주장일 뿐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집단적 사고 습관이 사회 현실을 형성하고 그것에 개인은 포박된다. 진실을 알면 함께 해방될 수 있다.

Rowan Hooper의 신간 <Togetherness> 리뷰
   
놀라운 자연 속 협력의 초상
경쟁만을 강조하는 우리의 사고 습관을 바로잡아야 한다.
   
1859년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을 출간했을 무렵 산업혁명과 영국의 식민주의는 전성기를 맞고 있었다. 그보다 5년 앞서 디킨스의 <어려운 시절>이 출간됐고, 영국 여왕은 명목상 전 세계 인구 5분의 1을 통치하고 있었다.
   
다윈의 진화론은 그들이 듣고 싶어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즉 ‘경쟁적 투쟁으로서 자연’이었다. 자연 선택론은 ‘식민지주의적, 자본주의적, 가부장적이며 상류층이 지배하는’ 세상에 등장했고, 철학자 허버트 스펜서가 ‘적자생존’이라고 거칠게 의역한 다윈의 핵심 메시지는 그 시대의 정서에 부합했다.
   
다윈주의와 이른바 ‘현대 종합’은 유전학과의 결합하면서 자연계에서의 경쟁을 지나치게 강조한 반면, 협력과 공동 작업의 역할은 과소평가했다. 이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해 저자는 다윈 이후 우리가 자연의 작동 방식에 대해 배운 것들을 깊이 반영해 일련의 교정을 시도한다.
   
자연의 경쟁적 측면을 발견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가젤을 노리는 사자, 먹이를 잡기 위해 급강하하는 맹금류 등이 그 예다. 하지만 사진에 잘 잡히는 동물 세계가 반드시 자연을 대표하진 않는다. 저자는 곰팡이, 미생물, 버섯처럼 부드럽고 끈적거리며 말랑말랑한 존재들 사이에서 종종 전혀 다른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표면적으로는 식물처럼 보이지만, 사실 균류와 조류의 공생체인 이끼도 마찬가지다. 각자는 상대방이 필요로 하는 것을 제공한다. 조류는 광합성을 통해 균류가 먹이로 삼는 탄수화물을 생산하고, 균류는 빛을 모으는 조류를 보호하며 확산을 돕는다. 이 관계는 공생적이다.
   
각 유기체는 서로 의존하며 함께 성장하고 진화한다. 때로는 이끼 공동체에 다른 파트너들, 가령 시아노박테리아(광합성 세균)나 효모가 합류하기도 한다. 이는 놀라울 정도로 생산적인 협력 관계로, 이끼가 열대우림부터 툰드라, 사막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곳에서 번성할 수 있게 해준다.
   
해양 생물인 산호만 해도 다채롭고 가지가 뻗어 있어 식물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사실은 동물(해파리와 말미잘과 같은 과인 자포동물)과 그 뱃속에 서식하는 조류의 협력체다. 조류는 햇빛을 이용해 광합성을 하는 반면, 숙주 동물은 손님인 조류에게 영양분과 이산화탄소를 공급한다.
   
다윈은 비글호 항해 중 산호초를 목격한 후 1842년에 산호초에 관한 책을 출간, 산호초의 석회암 껍질이 어떻게 섬 전체를 이루는 환초를 형성하는지 설명했다. 그러나 그는 산호가 공생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대부분의 육상 식물은 공생 균류, 특히 질소와 인과 같은 필수 영양소를 공급하는 균근이라 불리는 뿌리 균류에 의존합니다. 이런 공생 관계가 없다면 땅을 덮고 있는 숲과 초원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미생물 군집으로 이뤄진 덫이나 껍질만 있을 것이다. 난초는 식물 공생의 전형적인 예로, 개별 식물들은 지하의 균류 네트워크를 통해 서로 연결돼 있으며, 이를 통해 새싹에게 당분을 보낼 수 있다.
   
이건 기이한 현상이 아니다. 공생은 대부분의 생물체에게 자연스러운 상태다. 딱정벌레와 흰개미는 둥지 안에서 영양가 높은 균류 정원을 가꾼다. 우리 몸 안팎에 서식하는 박테리아, 즉 ‘미생물군집’의 중요성은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이들을 고갈시키는 항생제는 우리에게 소화 장애를 일으키지만, 일부 재발성 세균 감염이나 심지어 우울증조차도 분변 이식으로 치료할 수 있다. 이는 듣기에 역겨울지 모르나, 우리와 협력하는 미생물들을 다시 보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공생은 진화 초기 단계부터 주도해 왔다. 식물 세포에서 광합성을 담당하는 엽록체는 한때 자유롭게 살던 시아노박테리아였다. 우리 세포에서 에너지를 생산하는 미토콘드리아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단세포 생물 간의 영구적인 공생적 융합(내공생)은 1960년대에 생물학자 린 마굴리스에 의해 처음 제안되었다. 그녀는 ‘피와 이빨, 발톱으로 가득 찬’ 다윈주의적 진화관이 ‘순진하다’고 주장했다. 1987년 마굴리스는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세포 간 상호작용의 산물로 본다”고 썼다. 이러한 융합이 진화를 작은 단계가 아닌 거대한 도약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줄 수 있다.
   
마굴리스의 내공생 가설은 이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처음에는 회의론과 심지어 조롱까지 받았다. 성차별도 분명 한몫 했겠지만, 진화론 속 협력과 공동 작업이라는 개념에 대한 학계 생물학계의 저항, 혹은 이를 ‘이기적 유전자’에 의한 단순한 편의주의로 재구성하려는 의지에 대해서는 논문을 따로 한 편 써야 할 만큼의 주제가 있다.
   
마굴리스는 공생에 대한 회의론이 ‘여성적’인 것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다소 성별 본질주의적인 주장을 펼쳤지만, 자연계의 상호연결성을 강조한 주장이 종종 여성들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은 주목할 수밖에 없다.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이든, 리처드 파워스의 2018년 생태 우화 <오버스토리>에 등장하는 인물의 영감이 된 산림 과학자 수잔 시마드의 ‘우드 와이드 웹’이든.
   
이러한 상호 의존성은 생물권의 건강에 필수적이다. 가령, 해양 온난화로 인한 산호초의 재앙적인 ‘백화 현상’은 공생 조류가 더 따뜻한 물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 조류 없이는 산호는 파멸할 수밖에 없다. 산호초는 20세기 중반 이후 이미 절반으로 줄었다. 하지만 저자가 설명하듯, 공생 관계는 미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어 한쪽이 약속을 어기면 기생 관계로 치우치기 쉽다. 그러나 그는 궁극적으로 경쟁과 협력이라는 개념 자체가 의인화된 표현이며, 자연의 작동 원리에 도덕적 판단을 강요하는 경향이 있다고 경고한다.
   
본문에는 새로 알게 되는 정보가 많다. 기분 좋은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은 대부분 우리 장내 세균에 의해 생성된다. 어떤 개미들은 항생물을 생성해 둥지 동료들의 상처에 바르기도 한다. 바퀴벌레의 공생 세균은 그들에게 거의 어디서나 살며 무엇이든 먹을 수 있는 능력을 준다.
   
다윈 자신은 자연의 상호 의존성을 무시하기에는 너무나 예리한 자연학자였다. 그는 산호나 이끼의 공생적 비밀을 알지는 못했지만, 난초에 매료되었으며,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 생태학적 감수성이 그의 저술 전반에 스며들어 있다.
   
<종의 기원>의 유명한 마지막 구절(“끝없이 아름다운 형태들”)은 자연의 무자비한 개인주의가 아니라 공존의 그물을 강조한다. 다윈은 “다양한 종류의 수많은 식물로 뒤덮인 얽히고설킨 강둑을 바라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서로 매우 다르면서도 그토록 복잡한 방식으로 서로 의존하고 있는, 정교하게 구성된 이 형태들”이라고 썼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가장 경청해야 할 다윈의 메시지다. 저자는 “우리가 휩싸인 자연의 위기는 생태학적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으며, 이는 우리의 철학적·경제적 체제가 초래한 실패”라고 적는다. “우리는 세포의 가장 깊은 수준에서 공생하는 존재들이다.” 그는 자연과의 일체감은 막연한 녹색 환상이나 과학 이전의 신비주의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는 생명에 대한 우리의 가장 훌륭한 이해를 반영하며 따라서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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