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피에게 남기는 유서

봉천동 조지오웰 프로필 봉천동 조지오웰
2026-06-08 23:50 (수정됨)
갑작스러운 시한부 소식을 전하고 떠나서 많이 놀라셨죠. 저도 너무 놀라서 경황이 없었네요. 죄송해요.
그런데 이제는 어느 정도 죽음에 무뎌졌어요. 마음이 정리되고 있는 걸까요? 화창한 날 산책할 때는 제가 곧 죽는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릴 때가 있어요. 

추스름의 시간이 지나고 이제야 여러분에게 유서를 쓸 수 있게 됐어요. 잠깐 고통과 휴전을 할 때마다 소중한 사람들에게 보낼 유서를 써서 모아놓고 있어요. 제가 하늘나라에 가게 되면 어머니가 편지의 주인들에게 보낼거예요. 이 편지를 읽고 계신다면 저의 마지막 소식을 들은 뒤겠죠. 

처음 죽는다는 걸 알았을 때는 세상이 너무 원망스러웠어요. 이제서야 세상의 맛을 조금은 알겠는데.. 사랑과 커리어도 잘 풀려가고 있었는데.. 나무와 식물의 이름을 하나씩 알아가고 있었는데.. 이 모든 것이 한순간에 지속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어요. 

그렇게 고통의 시간을 보내다가 생각의 전환이 일어났어요. 세상의 맛을 조금은 보다가 갈 수 있어서 다행이다.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 새를 사랑하는 마음을 잠시라도 누릴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요. 북클럽 오리진을 만나고 일찍 눈을 뜰 수 있었어요. 저의 이 암이 유전이라면 어떤 삶을 살아도 33살에 맞닥뜨려야 하는 거라면.. 북클럽 오리진을 만나지 않았더라도 33살쯤 죽었을 것이고. 커리어와 성공에 쫓겨 불안이란 두 다리고 달리다가 '세상의 맛을 조금도 모르고', '소설과 인문학의 맛을 조금도 모르고' 삶의 끝을 맞았겠죠. 그게 아니라서 참 다행이에요. 짧은 인생이었지만 꽤나 농도 있었거든요. 사피 여러분 덕분입니다. 

혹시라도 제가 잠들어 있는 곳에 들리신다면 북클럽 오리진에서 읽고 있는 책을 놓아주세요. 욕심이겠지만 병근님의 큐레이션은 계속 받고 싶어서요. 나중에 이 세상에 오시면 그 책에 대해 함께 얘기 나눠요. 아마 그때는 처음으로 제가 병근님보다 그 책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거예요. 여기서 읽을 책이 몇 권 없으니 쿡 찌르면 문장이 나올 정도로 외우고 있을 거거든요. 

홈페이지 관리는 태희에게 부탁했어요. 태희가 사피님들과 함께 잘 관리해 나갈거라 믿어 의심치 않아요. 태희는 힘들게 개발한 기능이 병근님에게 거절됐다고 해서 서운해하지 말기를.. 

저는 북클럽 오리진 홈페이지에 글이라는 형태로 여러분과 함께할 거예요. 이 편지도 "오늘의 발견"에 올려줬으면 해요. 여러분을 만나서 세상의 맛을 조금은 알고 갑니다. 그럼 사피님들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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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행복공장 북캠프 "나에게 쓰는 추도사" 코너에서 낭독한 글을 홈피에도 올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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