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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안성기씨 추억

더듬이 프로필 더듬이
2026-01-09 21:50
나는 예전에 인터뷰를 꽤 많이 했다. 길고 깊은 대화를 좋아하기도 했고 그 과정에서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났다. 그중 한 사람이 오늘 발인이 있었던 배우 안성기씨다.

북클럽 오리진을 다음카카오 플랫폼과 제휴해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연재한 코너가 ‘요즘 무슨 책 읽으세요’였다. 각계 인물들에게 요즘 읽고 있는 책과 함께 근황, 삶에 대한 이야기와 생각을 듣고 다음 사람을 추천받아 이어가는 연쇄 인터뷰였다. 그때 지금 가장 핫한 배우 박정민도 풋풋한 모습으로 등장하기도 했는데, 안성기씨도 그중 한 명이었다. 이 인터뷰 시리즈는 뜻밖의 다양한 인물들을 책으로 연결하면서 꽤 인기를 모았고 2018년 2월 같은 제목의 책으로도 묶여 나왔다. 지금 읽기에도 손색이 없다고 자부한다.

너무나 소탈하고 겸손하고 온화한 사람이었던 안성기씨 인터뷰 전문을 여기에 옮겨 싣는다. 끝까지 읽어 보시길 권한다. 이하 전문.

국민배우 안성기. 한국 영화계의 오랜 기둥인 그를 이런 독서 릴레이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서동원 (바른세상병원) 원장으로부터 연락처를 건네받아 전화부터 했다. 마침 새 영화 촬영을 끝내고 이제 막 바깥 활동을 시작하던 참이라고 했다. 그는 압구정 CGV에서 만나자고 했다. 거기 신관 지하에 그의 이름을 딴 독립영화 상영관이 있다. 약속 당일 시간에 맞게 나온 그는 몸에 잘 맞는 블랙진에 편한 셔츠 차림이었다. 예순을 홀쩍 넘긴 나이가 믿기지 않았다. 분장이라고는 없는 민낯이어서일까. 가까이 마주 앉았을 때 눈에 들어온 잔주름을 보고서야, 그도 이제 ‘원로 배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관 1층 한쪽 모퉁이에 인터뷰를 할 만한 방이 있었다. 그는 직접 카페 매장으로 가더니 아이스커피를 들고 와서 건넸다. 특유의 푸근한 인상과 말씨에다 초면의 사람을 대하는 모습이 마치 오랜만에 재회한 집안의 형님 같았다. 책 이야기에 앞서 그의 근황과 배우 인생에 대한 질문이 길어졌는데 그는 매번 성심성의껏 답을 이어갔다. 과장이나 가식이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그가 어떻게 지금의 자리에 이르렀는지 짐작이 갔다.

- 많이 바쁘시죠?
이제 좀 바빠졌어요. 어제는 「런닝맨」 이라는 예능 프로그램도 처음 해봤어요. 그동안은 안 했는데 물론 이번엔 영화 마케팅 팀 의뢰도 있고 해서요. 영화 제목이 <사냥>인데 콘셉트를 추격으로 해서 잘 맞는다고 생각했어요. 런닝맨 팀이랑 하루 종일 뛰고 잠복하고 하느라 혼났어요. (웃음) 평소에는 서바이벌 게임 같은 게 애들 장난 같았는데 막상 해보니까 저도 애처럼 진지해지더라고요. 긴장감도 생기고. 색다른 경험이었어요. 역시 새로운 걸 하다 보면 새로운 느낌이 생겨요.

- 원래 TV엔 잘 안 나가시죠?
TV 와는 성격이 잘 안 맞는 것 같아요. 영화는 생각할 여유가 많고 재고할 수 있고 작업이 맘에 안 들면 다시 한 번 하자, 이런 게 있어요. 최선을 위해 달려가는 마음이 모이는 그런 거요. 일정도 방송과는 달리 이날 꼭 해야 하는 건 아니고 다음에 할 수도 있고. 반면에 TV는 싫으나 좋으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찍을 수밖에 없는, 차선을 택할 수밖에 없는 여건이다 보니까, 일단 근본적으로 안 맞아요. 또 TV는 굉장한 순발력을 요구하는데 저는 그런 순발력도 없어요. 아침에 대본 나와서 찍고 한다는 것은 저로서는 상상하기 힘들어요. 물론 촬영할 때는 집중해서 하지만 서둘러서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 일상은 어떠세요?
저는 살아오면서 큰 부침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늘 비슷해요. 일상이라는 것도 나다니는 것보다는 집에 있는 걸 좋아해요. TV도 보고 책도 보고 운동도 하고. 집안 청소는 제가 다 합니다. (웃음) 꽃도 가꾸고 이런 소소한 것들이 저한테는 시간이 많이 걸리기도 하지만 재미가 있어요. 사람이 큰일을 해서도 재미가 있겠지만 평소 소소한 일에서 오는 재미도 커요. 그리고 안정감이라고 할까요, 그런 것에 중독이 됐다고도 할 수 있어요. 날마다 하던 걸 안 하면 찌뿌둥하기도 하고, 땀을 흘렸을 때 어떤 성취감, 쾌감이 있거든요.

- 그 외는 영화 일인가요?
요즘은 1년에 한 편 정도 찍는데 준비와 촬영에 대부분의 시간이 들어가요. 그 외에 제가 맡은 일이 좀 있어요. 신영균예술문화재단에서 이사를 맡으라고 해서 눈에 잘 안 띄는 일을 하고 있어요. 젊은 감독들 지원하는 프로그램. 어린아이들 캠프, 장학 사업, 유니세프도 24년간 했고요. 아시아나 국제단편영화제 일도 13년 됐어요. 저는 한번 일을 하면 오래가는 걸 좋아해요. 그 일하는 사람과 같이 호흡하는 걸 좋아하죠. 그래서 그런 일들이 쭉 같이 가고 있는 거죠.

- 촬영하는 영화에 따라 평소 생활이나 기분이 바뀌기도 하나요?
이번에 개봉하는 <사냥>의 경우에는 육체적인 장면이 많이 요구되는 영화예요. 그전의 임권택 감독의 <화장>은 어떤 사람의 생각에 관한 것이고. 어떤 영화를 하느냐에 따라 분위기도 많이 달라지죠. 거기에 집중하다 보면 일의 성격에 따라 조용해지기도 하고 활발해 지기도 하고.

- 촬영이 끝나도 연기자로서 할 일이 남아 있나 보죠?
보충 녹음 같은 게 있어요. 대사 전달이 잘 안 됐다거나 어떤 장면에서 감정이 좀 모자랐다거나 할 때 다시 입히는 작업이죠. 그런 건 늘 하는 거예요. 영화는 연출자와 제작자가 참여하는 시간이 제일 길지만, 배우는 캐스팅되면서 일이 시작되니까 짧은 편인데도 최소 7~8 개월은 간다고 봐야죠.

-이번 영화는 얼마나 걸리셨죠?
작년 5월에 제의가 와서 촬영은 9월부터 들어갔죠. 그전에 시나리오 보면서 계속 얘기를 하다가 두 달 전부터 액션을 연습했죠. 서로 치고받거나 낙법 같은 것. 또 총 쏘는 것 때문에 사격장 가서 총도 좀 쏘고. 이런 준비 과정 거쳐서 12월 중순쯤에 촬영이 끝났어요. 9월 16일에 시작해서. 영화는 하루 만에 일어나는 일을 그린 건데도. (웃음) 촬영 기간 중에는 시간이 가면서 낙엽도 누렇게 변해 있어서 CG로 색도 입히고, 날씨도 추워져서 물에 들어가고 비도 맞아야 할 때는 어휴- 관객이 모르는 고통이 많이 있었죠.

- 이번이 몇 번째 작품인가요?
지금까지 90편 정도 될 겁니다. 성인이 돼서는 90편. 어렸을 때 아역으로는 70편 했다고 그래요. 정확한 숫자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 영화는 필름이 소실된 게 많아요. 정말 안타 까운 일인데 그래서 아주 훌륭한 감독님들이 많은데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필름이 없어서. 심지어 김기영 감독님 같은 분도 여러 작품을 같이 했는데. 그중 필름이 남은 영화가 <하녀>예요. 그래서 지금은 그 작품이 주로 소개되는데, 그분이 사실은 굉장한 분이세요. 초기에는 굉장히 네오리얼리즘적이었어요. 이태리 전쟁 이후 극사실주의적인 영화가 많이 나왔는데 그 감독님도 그렇게 접근한 게 많아요. 그런데 그 필름이 하나도 없어요. <하녀>는 뭐랄까, 약간 좀 만들어진,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연출한 거거든요. 나중에 시리즈로 <충녀>, <화녀>가 나와서 그분은 그런 식으로만 규정이 지어졌는데 그전의 필름들이 진짜 좋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렸을 때 저의 생각으로도 굉장히 좋았다는 느낌이 있어요.

- 왜 그렇게 소실이 많이 됐죠?
보관이 부실해서죠. 1976년부터는 한국영화진홍공사가 영화 제작사에 의무적으로 보관용 필름을 제출하게 했지만 그전에는 관심들이 없었어요. 보관했던 필름도 어디 영화제에 쓴다고 가져갔다가 분실되거나 아주 어처구니없이 사라진 게 굉장히 많아요. 지금은 영화 투자사들이 메이저 아닙니까. 콘텐츠가 두고두고 자산이 되니까 보관도 잘하는데, 예전에는 영화 제작자들이 개인이고 대부분이 돈 받아서 벌면 끝이라고 생각했죠. 그게 자산이 된다는 생각을 안 했으니 보관이 허술했죠. 필름이라는 게 보관 상태가 조금만 안 좋아도 달라붙고 금방 안 좋아지거든요. 옛날엔 냉방도 잘 안되던 시절이니까 다 엉망이 돼서 갖다 버린다든가 했죠. 그래서 감독들도 제대로 평가를 못 받게 된 거죠.

- 1976년 이전 것은 대부분 유실됐겠네요.
그런 게 굉장히 많아요. 그래서 제가 몇 편에 출연했는지 정확히 몰라요. 그런 기억을 잘 하시는 정종화 선생님이라고 계시는데, 영화 포스터니 뭐니 자료를 제일 많이 갖고 계세요. 그분이 영화 연도까지 컴퓨터처럼 기억하시는 분인데, 저보고 70편 했다고 하더군요.

- 영화 출연하실 때 기준 같은 게 있나요?
그것도 큰일 중 하나예요. 쓴 분들은 열심히 썼으니 어떻든 잘 읽어 봐야 할 것 아니에요. 그래도 좋은 것보다는 별로다 싶은 게 많고, 애매모호한 게 대부분이에요. 좋다는 것은 극소수죠. 그런 걸 만나면 무조건 하는 거죠. 좋은 시나리오라는 건, 다른 것도 마찬가지겠지만, 굉장한 상상력을 자극해요. 읽어 가는 중에 영상이 보이죠. 생각이 떠올라요. 반면에 그런 게 안 떠오르고 꽉 막히는 게 있어요. 더 이상 발전이 안 되는 시나리오가 있거든요. 그러면 괴롭게 읽죠. 어떻게 다 읽긴 해도 이건 안 되겠구나 싶죠. 좋은 시나리오는 읽기만 해도 신이 나요. 읽었던 것 다시 읽고, 액션도 생각이 나고 카메라 시선도 음악도 막 생각이 나요. 그런 게 훌륭한 시나리오죠.

- 시나리오 읽는 데도 시간이 많이 들어가겠네요.
그렇죠. 평소에도, 가령 <사냥>을 찍는다고 하면 촬영하는 기간에는 거의 날마다 읽어요. 그다음 날 할 것들, 어떤 생각을 더 할 수 있을까, 어떤 느낌을 더 가질 수 있을까, 아니면 사람들이 전혀 생각지 도 못한, 돌발적인 상식을 깨는 뭔가가 없을까, 끊임없이 생각해 보는 거죠. 그게 굉장히 중요하고 거기서 새로운 생각이 나와요. 물론 연극 같이 세팅된 무대에서 하는 게 아니고, 촬영 현장이 어떨지 모르기 때문에 현장에 가서 순발력으로 대처해야 하는 것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사전에 많은 생각과 연구에 의해 좌우가 된다고 봐요. 그래서 제가 평소에 많이 얘기하는 건데, 배우는 자기 시간이 많아야 해요. 생각할 시간, 공상, 상상할 시간이 많아야 해요. 요즘은 다들 배우들이 촬영할 때 제 시간을 가지려고 해요. 방해를 안 받고 집중하려고.

- 시나리오를 읽다가 공부도 하시나요?
물론이죠. 필요한 공부도 하고 액션도 배우고.

- 책을 찾아 읽기도 하나요?
그런 경우도 있어요. 최근에는 내년에 찍을 예정인 영화가 있는데, 진도 다시래기 풍속이 들어가요. 장례식장에서 상가 분위기를 축제처럼 띄우는 사람들 이야기인데, 거기선 진도 사투리를 써야 해요. 감독이 추천해 줘서 전라도 탯말이라는 걸 익히는데, 소설을 읽어요. 전라도 쪽 주제로 한 소설 속에 대화가 많이 나오는데 그런 걸 읽으면 굉장히 도움이 많이 되죠. 그 외에도 작품 속 인물에 가까이 가려고 이 노력 저 노력을 하죠.

- 연초에 어떤 행사에서 뵈었을 때 백발이었는데 영화에 몰입하기 위해서였나요?
몰입보다는 극 중 캐릭터 때문이죠. 머리를 두고도 며칠을 만나서 이야기해요. 생각도 해보고 그림도 비춰 보고. 배역이 60대 중반이어서 반백 정도면 좋겠다 싶었어요. 그냥 직접 길러서 해보면 좋겠다 싶어서 기를 때까지 길러 봤는데 결국 묶기에는 짧았어요. 그런데 그 모습이 아주 좋았어요. 그래서 촬영 끝나고도 이러고 다닐 거야 싶었는데, 그게 잘 안 되더군요. 지금 모습은 제 나이에 비해 젊은데, 흔히 생각하는 60대 중반은 그게 맞는 것 같아요. 하지만 사람들이 낯설어 해서 다시 돌아왔어요. 촬영 기간 중에는 영화 찍느라고 그렇다고 답하면 모든 게 설명이 됐는데, 그게 아니면 이상하게들 생각해요. 무슨 변화 있냐면서 어려워해요. 그래서 수염부터 깎고, 다시 염색하고 머리도 짧게 자르고 해서 원래로 돌아왔어요.

- 영화 촬영할 때 징크스나 수칙이 있나요?
특별한 건 없어요. 저의 외부에서 뭘 찾으려고 하지는 않아요.

- 늘 꾸준하고 기복이 없는 인상을 줍니다. 배우는 좀 극적이어야 할 것 같고, 일상도 일반인과는 좀 달라야 할 것 같은데 바른 생활 모범생 같아요. (웃음)
어차피 삶은 자기 인생을 사는 거니까 자기 만족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물론 배우는 대중을 상대로 뭔가를 줘야 하는 입장이잖아요. 저는 영화 속에서 다 깨보고 싶어요. 그냥 평소에는 흰색 도화지, 아무것도 안 입힌 상태로 놓아두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아주 일상적이고 평상적이고, 어떤 느낌도 없을수록 좋아요. 제 이미지는 고착된 게 많죠. 부드럽고 가정적이고... 그런 게 있지만, 거기에다 더 많은 것을 칠해 놓으면 배우로서 어떤 인물을 채색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평상시에는 놔뒀다가 영화 속에서 마음껏 뭔가를 보여 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편차가 더 클 수 있을 것 같아요. 늘 변화가 많은 사람은 영화에서도 그래 봐야 비슷한 느낌일 테고, 평소에는 조용한 사람이 영화 속 인물의 감정 기복 같은 데서는 표현이 크면 효과가 더 클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가끔 정치 같은 것 제의가 오면 저는 그럽니다. “저는 영화 속에서 대통령도 하고 왕도 하고 충신도 해보고 다 하고 있고, 앞으로도 할 겁니다, 그러니 평소에는 저 개인으로 조용하게 사는 게 좋겠습니다”라고요.

- 아직 못 해본 역할도 있나요?
지독한 악역은 못 해봤어요. 그렇다고 그걸 꼭 해야겠다는 강박도 없어요. 거의 모든 직업을 다 해본 것 같아요. 특별한 것 말고 일반적인 직업은.

- 그중에 제일 잘 맞는 옷 같은 배역은?
대부분의 배우들이 평소에 쉴 때도 아무 땅바닥에나 앉아도 되는 편한 역을 좋아해요. 영화 「 라디오 스타 」 에서처럼 평소 입던 옷 그대로 입고, 특별히 분장 안 해도 되는 그런 역할이 좋아요.

- 아역 배우를 하다가 중간에 공백기가 있었지요?
10 년 가까이 되죠.

- 지금까지 오랜 연기 이력을 시기로 구분할 수 있을까요?
어린 시절은 일단 제쳐 놓고요. 제 의지로 배우를 다시 시작한 게 78년이니까 그때부터 80년도까지를 한 시기로 볼 수 있을 텐데, 70년대 우리 영화 패턴을 그대로 따라갔던 시기예요. 그때 유일하게 홍행작으로 만들 수 있었던 소재인 사랑 영화 두 편과 반공 영화 한 편을 했죠. 의무 제작 편 수를 채우기 위한 영화를 포함해서 모두 네 편을 했는데, 그때는 심적으로 힘들던 시기였어요. 평생 해야 할 작업인데 이렇게 갇혀 있고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분위기 속에서 일을 계속 해야 한다는 것이 힘들게 느껴졌어요. 80년대에 들어와서 이장호 감독을 만나 <바람 불어 좋은 날>을 했지요. 박 대통령 죽고 5 · 18 민주화 항쟁이 일어나던 와중에 5공이 시작되기 직전에 개봉했어요. 당시로서는 행운이었어요. 사회성 있는 영화여서 검열 통과하기가 어려울 거라고들 했는데 어수선한 시기에 어떻게 해서 나왔어요. 확실치는 않은데 제 기억으로는, 박완서 선생님이 민간인 측 심의위원으로 있으면서 통과시켜야 된다고 고집해서 상영될 수 있었어요. 그때부터 영화계가 조금씩 새로운 이야기를 해보려고 했고, 그동안 못 했던 것들을 시도해 보려던 시기였죠. 그때 출연작이 많았어요. 장선우 감독의 <성공시대>, 이명세 감독의 <개그맨>, 박광수 감독의 <칠수와 만수>, 곽지균 감독의 <겨울 나그네>···, 하여튼 신인 감독이 전부 데뷔한다고 하면 저랑 같이 했어요.

- 전성기였네요?
네. 80년대는 배창호 감독과 계속해 왔고. 점차 영화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나가면서, 기술적으로도 조금씩 좋아졌죠. 동시 녹음도 다시 생겨났고. 하지만 아직도 국내 영화 자본이 영세했어요. 90년대에 들어오면서 소재도 많이 개방되고, 대기업 자본도 들어오면서 영화가 산업화하기 시작했죠. 제 개인적으로는 90년대 중반까지는 주연만 하다가 조연을 하기 시작했어요.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세계 속의 한국 영화가 됐죠. 세계가 인정하는 영화 작가 수준의 감독들이 많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천만 관객 영화가 나오고 멀티플렉스도 늘어나고 극장 환경이 완전히 바뀌었죠. 모든 게 전산화해서 한눈에 상황도 알 수 있고.

- 아역 배우를 하다가 그만두신 것은 영화가 길이 아니라고 생각해서였나요?
영화가 싫어서라기보다,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역할이 없어진 거죠 요즘도 영화에서는 고등학생 역할이 별로 없어요.

- 청춘스타들이 있지 않나요?
고등학생 역할은 거의 없어요. 특별한 경우만 그렇고, 일상적으로는 배역이 잘 없어요. 그래서 저는 ‘그러면 잘됐다, 그동안 제대로 다니지 못한 학교나 제대로 다녀야겠다’ 싶었죠. 그래도 고 1, 고 2 때 한 편씩은 했던 것 같아요. <하얀 까마귀>, <젊은 느티나무> 두 편을 더 했죠. 계속 이어서 하던 것은 중 3 때까지뿐이었어요. 사실 저는 평범하게 친구들과 어울려 딴생각 안 하고 다니는 게 좋았어요. 어릴 땐 초등학교 때부터 학교에 안 간 날이 더 많았거든요. 늘 불안했어요. 뭔가 안정이 안 된 거죠. 오전에 공부하고 있으면 오후에 제작부장이란 분이 데리러 와요. “촬영하러 가자”고 하면 다른 애들이 “야 좋겠다”고 하는데, 저는 하나도 안 좋았어요. (웃음) 공부가 좋았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냥 친구들하고 같이 있고 싶었어요. 그런데 자꾸 빠져나가야 하니까 싫었어요. 그래서 제가 영화를 다시 하겠다는 생각은 잘 안 했어요. 대학 가서는 연극회 회장도 하곤 했지만 영화를 하기 위해서 계속 연결을 한 건 아니었어요. 외대 베트남어 학과에 갔을 때도 베트남에 가서 돌파구를 찾아보자 싶었어요. 그래서 ROTC에도 지원했죠. 여러모로 행동하기 편하 게 장교로 가는 게 좋겠다 싶어서. 그런데 졸업과 동시에 월남 추가 파병이 금지됐어요. 결국 전방에 가서 근무를 했고, 베트남이 공산화하는 바람에 국내 취직도 안 됐어요. 당시 ROTC 출신은 서류만 내면 대기업에 다 들어갔는데 저만 안 됐어요. 베트남어 전공자가 쓸모가 없어졌으니 떨어진 거죠. 결국 다시 생각을 해보니 남들보다 잘할 수 있는 건 영화 아니겠나 싶었어요. 신인 배우들이 어려워하는 게 카메라 앞에 서면 시선 둘 데가 마땅치 않다는 건데, 저는 편안했거든요. 어릴 때 늘 그 앞에 있었으니. 그게 굉장히 큰 도움이 됐고 다시 시작하는데 무기였던 거죠. 또 하나는, 어릴 때 봤던 분들이 영화 현장에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저를 반갑게 맞아 줬어요. 신인은 처음에 모든 게 낯설고 좀 힘들게 하는 사람도 많고 한데, 저한테는 전부 “야 많이 컸구나” 하면서 반겨 주니까 좀 빨리 시작할 수 있었죠.

- 영화계 복귀해서는 빨리 스타가 된 편이죠?
복귀하기 전에 업자 생활을 한 2년 했고.

- 업자라면 무슨 일을 하셨나요?
제대하고 영화하기 전까지 실업자! 방콕맨 말이에요. (웃음)

-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때였겠군요.
가장 좋았던 시기…

- 가장 좋았다고요?
가장 힘들었지만 저한테는 가장 소중했던 시간이었으니까.

- 어떤 점에서요?
그 2년 동안 영화를 다시 해야겠다 마음을 먹고 본격적으로 준비를 했어요. 우선 영화 현장에서 뛰려면 몸을 잘 만들어야겠다 싶어서 체력을 준비하고, 영어도 좀 하자, 이러면서 실업자 기간 동안 시간표도 만들고 해서 일부러 아주 바쁘게 지냈어요. 가장 좋았던 것은 저녁에 밥을 먹고 나서는 무조건 방에 틀어박혀 시나리오를 썼어요. 그렇게 해서 완성된 게 네 편이었는데, 개발새발 내용이야 어떻든 간에 끝을 본다는 게 참 의미 있는 일이더라고요. 네 편을 딱 쓰면서 하여튼 저도 모르는 사이에 영화에 대해서 굉장히 많이 알게 된 것 같았어요. 그때는 딱히 일이 없으니까, 어떻게 하면 저녁 시간을 돈 안 들이고 집에 폐가 안 되게 보낼 수 있을까 싶었죠. 시나리오는 원고지와 펜 하나만 있으면 되는 거니까, 일단 내가 이 나이 되도록 집에 피해는 안 주겠구나 생각했어요. 한 시간 정도 뭘 하나 구상해서 시퀀스를 써나가는데, 오늘 한 마디 했다가 요 다음에는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이 생각 저 생각 하면서 썼어요. 지문도 감독 콘티처럼 아주 세밀하게 썼어요. 인물의 심리라든가 카메라 앵글, 빛까지 다 생각하면서. 어떤 날은 원고지 한 장을 쓴 적 도 있고, 많이 써야 넉 장 썼을까요. 어떤 날은 하나도 못 쓰고 생각만 하다가 잠들기도 하고. 그 밤 시간이 저한테는 굉장히 풍부하게, 영화를 전공하지 않았으면서도 끊임없이 영화를 생각해 보게 만든 거죠. 당시엔 일반 배우들이 감독들하고 작품 이야기하는 게 드물었어 요. 시스템 자체가 한 영화 끝나면 좀 쉬었다가 털어 내고 다른 영화로 넘어가고 하는 게 아니라 동시에 서너 작품을 늘 같이 하는 게 일상이었어요. 지금은 그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일반화됐지만. 이장호 감독님하고 처음 만나서 <바람 불어 좋은 날>을 찍을 때, 처음엔 원래 제가 캐스팅이 아니었어요. 하고는 싶은데 그 역할을 하기에는 제 외모가 너무 샤프하고 잘생긴 쪽이라고 했어요. 그래도 저는 “아니다, 난 할 수 있다”면서 장호 형한테 “제가 시나리오 쓴 것 있는데 보실래요?” 했어요. 그걸 높게 평가해 주셨어요. 당시 배우들 삶이 그렇지 못했으니까. 자기 시간을 가질 수 없었으니까 그러기가 어려웠는데, 제 시나리오를 보시고는 “너 감각 좋다” 이러면서 점점 가까워져서 결국 일을 하게 됐죠. 그 후에 배창호 감독과도 영화를 열몇 편 계속하면서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했어요. 요즘에는 그런 친구들이 많죠. 영화 전공한 친구도 많고 자기 역할 외에도 작품 자체를 가지고 이야기 나누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당시만 해도 없었어요. 그 실업자의 시간이 제게는 굉장히 좋았어요. 오후에는 주로 프랑스 문화원에 가 있었어요. 당시엔 스크린 쿼터제 때문에 해외 영화는 볼 수 있는 게 연 25~30편 정도였어요. 그러니 할리우드의 아주 상업적인 영화가 주를 이뤘죠. 돈을 벌어야 하니까. 다른 유럽 예술 영화 같은 것은 보기 힘들었어요. 알랭 들롱이나 장 가뱅이 나오는 갱스터 영화 몇 편 말고는. 영화 편식이 심했죠. 저로서는 영화의 규모라든가 인간을 소재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프랑스 영화가 공부하기 좋겠다 싶어서 주 2~3 회씩 날을 잡아서 계속 갔는데 그게 굉장히 공부가 많이 됐어요. 그런 시간이 2년, 그리고 조연 생활 2년 할 때와 연결이 되면서 한 4년의 시간이 지금까지도 제겐 아주 굉장한 힘이 되고 있어요. 그 당시로선 너무 힘들었지만, 왜냐면 잘될지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에. 모든 일을 시작하는 신인들은 마찬가지겠죠. 잘되고 보니까 그때 시간들이 나한테는 정말 좋은 약이 됐구나 하는 생각이 들죠.

- 겉보기에 워낙 무난하고 꾸준한 분이어서 저런 분도 좌절이나 힘든 시기가 있었을까 싶었는데 그런 시간이 있었군요.
네. 그래도 제 경우에는 시행착오가 적었던 게, 어른들 모습을 보고 자라서일 거예요. 어렸을 때 보던 어른들이 나이 들어 보니까 변해 있을 거 아녜요? 계속 잘된 분도 있고, 완전히 망가진 분들도 있고 하니까. 어떻게 지내 오신 분들이 아직도 잘 건재하고 있나 봤더니, 대부분이 가정적으로 안정되고 일에 집중하고 일 중심으로 사는 분들이더군요. 그렇지 않고 다른 일 신경 쓰고 부업도 하고 하면, 그건 아니더라는 거죠. 그런 식으로, 신인이 겪을 시행착오 같은 것을 미리 느꼈어 요. 그리고 인기라는 게 그렇게 허망한 것이라는 걸 미리 알아 버렸어요. 거기서 제일 많이 초심을 잃고, 변했다는 얘기도 듣고,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가슴 아프고 하는데 그런 기간이 저한테는 없었지요. 굉장히 큰 사건이 저한테는 미리 해결이 된 상태에서 가니까 부침 없이 쭉 올 수 있었던 거죠. 그리고 일이 제일 중요하다는 걸 알았어요. 저한테는 영화가 제일 우선이었어요. 가령 인터뷰나 다른 행사나, 그런 것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일 다음이었어요. 무슨 일이 생긴다고 순서를 바꾸거나 하지 않았어요. 그러다 보니 제가 여행 한 번 제대로 가본 적이 없어요. 재작년까지는 없었어요. 진짜 일에 많은 시간을 쏟았어요. 그런 바람에 지금까지 온 것이고, 하지만 앞으로는 제 시간을 좀 가지려고 해요. (웃음) 여행도 하고, 예전에 비해 그만큼 시간 여유도 좀 생겼고······.

- 매사에 아주 계획적이고 준비를 착실히 한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아니요. 그렇지 않았어요. 뭘 어떻게 해서 어떻게 해야겠다는 식으로 아주 계획적이지는 않았어요. 막연했어요. 다만, 어떻게 되든지 한번 가보자 하는 그런 막연한 건 있었어요. 베트남을 생각했을 때도, 당시 한진상사가 진출해 있으니 그걸 어떤 식으로 접근해서 어떻게 해야지 이런 게 없었고, 하여튼 장교로 가보자, 가면 뭔가 길이 또 있겠지 이 정도로 생각하다가 이렇게 된 거죠.

- 그래도 무직 기간 중에도 생활 계획을 세워서 집에 틀어박혀서 시나리오 공부한 것을 보면.
그건 그랬던 것 같아요. 저 자신을 아꼈어요. 막 내팽개치고 자학하고 술 마시고 마구 구는 식은 없었어요. 그렇게는 못 하겠더라고요. 그리고 매사가 긍정적인 편이에요. 남 탓 안 하고, 내가 잘하면 되는 것이고 잘못되는 것도 내가 한 것이고, 모든 걸 그런 식으로 생각하다 보니 큰 어려움이나 갈등 같은 것도 생각보다는 완화돼서 끝나는 경우가 많았어요.

- 시나리오 습작을 시작했을 때는 영화에 대한 인생 목표가 확고히 섰나 보죠?
그럼요. 그래서 군대 제대할 때 강제 적금 탄 게 몇십만 원 있었어요. 그걸로 중대 연극영화과 대학원을 등록했어요. 한 학기를 지나는데 다른 친구들에 비해 저는 공부가 굉장히 힘들었어요. 습관이 안 돼 있고 방법이 차곡차곡 쌓이지 않았기 때문에. 고등학교 때부터 막 외워서 어떻게 해보려고 했는데 안 됐죠. 공부는 안 되겠다, 때려치우고 현장으로 가자 싶었어요. 그 뒤로 배우 수업을 나름대로 혼자 한 거죠. 영화 많이 보고, 운동하고, 시나리오 쓰기를 계속했죠. 당시에 아버님이 계시던 곳이 그 전엔 영화 제작도 하다가 실패하고 기획을 하셨는데, 그 회사의 스크린 쿼터용 계몽영화 비슷한 작품 <병사와 아가씨들>에 제가 출연했죠. 홍행과 상관없어서 누가 해도 되는 거였어요. 터널을 지키는 병사와 터널 안에 사고가 나서 갇힌 버스의 여자 차장과의 이야기. (웃음) 영화계 사람들은 “아 저놈이 영화를 새로 시작했구나” 아는 정도였지만 일반 사람은 전혀 모르는 영화였어요. 그리고 두 편의 상업영화를 했는데 존재가 많이 알려지진 않았고, 반공영화는 심적으로 힘들었는데 더 이상 나빠질 게 있겠나 하는 마음으로 버텼어요. 그러던 중에 이장호 감독을 만났고, 80년대라는 시대가 꺾이면서 저와 맞는 시대가 된 거죠.

- 그 뒤로는 계속 승승장구하셨나요?
더 고비는 없었어요. 고비는 자기가 만든다고 봐요. 예를 들어 조연 배역에 대한 요청이 자꾸 들어오는데 “나는 조연 안 해” 그러면 자기가 고비를 만드는 거죠. 주연을 계속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것은 사람들 요구에 달린 거예요. 그게 그 사람의 현재 위치를 얘기해 주는 거거든요. 상품으로 치면 수요와 공급이 만나는 지점인데 수요는 생각 안 하고 자기 고집만 피우면 거기서 차질이 생기는 거죠. 저도 사실 약간 마음이 아팠지만 시장의 논리를 따르기로 했어요. (웃음) 왜냐하면 새로운 사람이 많이 나왔으니까. 내가 그 역할을 하는 것보다는 실제로 젊어서 그 역할을 할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까, 자연적인 세대교체가 이뤄지는 거라 생각하는 거죠. 나는 그중의 일원이 돼서 같이 작업하면 되죠. 제가 늘 주장하는 것이, “그래도 존재감은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아무리 잠깐 나와도 그 사람이 화면에 떴을 때 존재감이 뚜렷하면 생명력이 있어요. 그런 존재감을 갖추기 위해 지금 자신의 준비, 마음가짐, 이런 걸 철저히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배우의 역할은 자기가 진짜 힘들 때까지는 늘 있다고 생각해요. 그 역할이 어떤 것이든, 자기가 영화 현장에 있고 싶다고 할 때까지, 자기가 충실하기만 하면 출연할 수 있는 작품이 1년에 한 편이 없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연 200편 쏟아지는데, 할아버지 역할은 있을 거라고 생각하죠. 그 역할에 충실하다 보면, 나름 그 영화 속에서 잘했다면 감동을 줄 수도 있겠고, 그 감동이 어떨 때는 굉장히, 관객이 보기에 “야, 이건 짧게 산 사람은 줄 수 없는 그런 감동이네” 이런 것이면 좋겠죠. 그러니까 자기 하기 나름이라는 거죠. 그게 참 힘들긴 하겠지만, 하여튼 출발 지점의 초심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때 마음을 잊지 않는다면 지금도 너무너무 행복하다는 생각이 터져나오는 거죠.

- 오래 지나오고 나니 영화계의 변화가 보입니까?
전체 파이가 굉장히 커졌어요. 돈 가치가 바뀐 걸 감안하더라도, 가령 1억 들여 만들던 영화가 지금은 50억, 100억으로 만드는 때가 됐죠. 무엇보다 일반인의 생각이 굉장히 많이 변했죠. 제가 시작할 때만 해도 영화하는 사람은 조금 이상한 사람들, 성을 갈았거나 예명을 쓰거나 집을 뛰쳐나왔거나 그런 사람이 많았어요. 당시엔 연극영화과도 예비고사 떨어진 사람도 갈 수 있는 곳, 좀 논다는 학생들이 다 모이는 과라고 보는 고정관념이 있었어요. 부모들도 거긴 골치 아픈 애들 가는 덴가 보다, 그런 사람들이 만드는 영화니 오죽하겠냐, 뭐 이런 식이었죠. 지금은 시대가 변해서 연극영화과 가려고 하면 “네 실력으로 어 떻게 가려고 그래” 그럴 정도로 바뀌었죠. 주위를 봐도 이쪽 선호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음악, 연극, TV 이런 것 통틀어서 다른 분야 사람들이 영화 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해요. 언젠가는 꼭 한번 영화 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아요.

- 대선배인 셈인데 연기 수업이나 지도도 해주세요?
전혀. 저는 누구를 가르치거나 심사하거나 이런 능력은 없다고 생각하고, 그런 것 참 싫어해요.

- 후배가 멘토링을 청하진 않나요?
그러진 않아요. 뭐, 어쩌다 얘기할 게 있으면 지금 이런 식의 이야기, 살아가는 이야기, 영화에 대한 생각, “뭐, 이런 게 좋지 않겠나” 이런 얘기할 기회는 자주 있죠.

- 혹시라도 진로로 고민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이야기를 해주세요? 뭘 유념하라든가.
계속 준비하라는 거죠. 준비하고 있으라는 거예요. 신인도 마찬가지고, 준비가 잘돼 있으면 언제든지 뽑혀요. 뽑혔는데 준비가 안 돼 있으면 그렇게 몇 년 또 가요. 준비가 잘돼 있으면 바로 뽑히고, 그다 음이 바로 연결이 돼서 일을 계속하게 돼요. 그러니까 자기한테 굉장히 철저하게 모든 것을 준비하고 있으면 계속할 수 있어요. 자기를 놔버린다거나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다른 데서 뭘 찾아본다거나 그러면 곤란해요. 뭘 해도 불안한 미래인데, 자기가 준비를 잘하고 있으면 된다고 늘 생각해요.

- 작가의 시나리오도 써보셨는데 앞으로 제작에 대한 꿈은 없으세요?
아뇨. 제작, 감독은 한 번도 생각 안 해봤어요. 그건 다른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 외국은 감독 겸한 배우도 많잖아요?
우리는 감독 일이 너무 많아요. 부담스러운 일도 상당히 많고. 감독들 고충을 아는데 그 고통스러움에 들어가 보려는 용기도 안 나요.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 창작 열망이 넘쳐야 해요. 그것 없이 한 번 해봐야 되지 않겠나, 이래서는 성공하기 어려워요. 시나리오가 아주 좋아도 성공하기 힘든데 애매한 상태에서는 어렵죠. 다른 사람들이 갖지 못한 어떤 세계를 그려 보고 싶다, 그런 게 없는 거죠. 저는 그냥 연기하는 것 이것만 해도 아직 멀었다, 좀 더 훌륭한 연기를 할 수 있을 텐데 ··· 진짜 날마다 보면서 아쉽다 아쉽다 그래 요. (웃음) 성격 탓도 있을 거예요. “좋아” 이게 아니라 늘 “아, 저때 분명히 최고의 감정, 최고의 표현이 있을 텐데 ······” 안타까워하죠. 늘 선택의 상황에 놓이는데 이쪽을 택하면 다른 쪽이 아쉬운 거죠. 이렇게 했으면 다른 방향으로 갔을 텐데,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아주 죽을 맛이에요. (웃음) 연기만 해도 이렇게 생각할 게 많은데, 연출 제작 쪽까지 생각할 여력이 없는 것 같고, 그건 또 다른 그릇이라고 생각해요.

- 완벽주의자라는 생각을 본인도 하세요?
그런 것 있어요.

- 오늘 말씀 듣다 보니 양면이 공존하는 것 같아요. 낙천적이라고 하면서도 놓쳐 버린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시하는 것도 그렇고.
그럼요. 그런 것 있어요. 그런 게 있으면서, 또 “아이, 뭐 그럴 수 있지 뭐, 다음에 보지 뭐“ 이러고. (웃음)

-  책은 얼마나 읽는 편이세요?
사실은 많이 못 읽는 편이에요. 특히 촬영 중에는 거의 다른 책을 안 읽어요. 촬영 끝나고 좀 편안할 때 읽는 편이죠. 가끔씩 조금씩 읽는 편이에요. 문학을 좋아해요. 인문서는 좀 어렵고. 이번에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 받은 한강 작가를 보니 예전에 이상문학상 수상작 (2005 년 중편 <몽고반점>으로 수상)이 생각났어요. 굉장히 강렬한 작품이었다는 기억이 나요. 소설을 좋아하는 편인데 최근에는 잘 못 읽었어요. 이상문학상 수상 작품집은 1회부터 한동안 계속 사 봤어요. 소설을 볼 때도 영화적으로 봐요. 인물을 보면서 영화적인 시나리오, 장소 같은 것도 설정해 가면서. 배우를 하다 보니까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의 감성, 어떤 표현 같은 것들에서 얻는 게 많아요.

- 최근에 읽은 책이라면요?
다시 꺼내 읽게 된 책이 있어요. 최인호 작가의 <생>이에요.

이 책 속에 실린 글들은 2008년 5월 첫 수술을 받고 난 이후에 쓴 작품들이다. (·····) 글들이 종교적이어서 보편적인 것을 기대한 독자들에게는 죄송하지만 어쩔 수 없다. 작가는 어차피 그때그때 그가 마음에 담고 있는 생각들을 쏟아내기 마련이니까. (······) 고등학교 2학년 때 신춘문예에 입선함으로써 데뷔했는데, 그동안 명색이 작가랍시고 거들먹거리고 지냈음이 문득 느껴져 부끄럽다. 진심으로 머리 숙여 사죄한다. 올겨울은 유난히 춥고 길어서 어서 꽃 피는 춘삼월이 왔으면 좋겠다. 혹여나 이 책을 읽다가 공감을 느끼면 마음속으로 따뜻한 숨결을 보내 주셨으면 한다. 그 숨결들이 모여 내 가슴에 꽃을 피울 것이다. - 최인호, 『 인생 』 중에서

생전에 형이라고 부르면서 친하게 지냈는데, 돌아가시기 6개월 전에 출간된 책이죠. 암 수술을 받기 시작하고 힘든 투병 생활하면서 고통 속에서도 집필을 멈추지 않고 쓴 글이에요. ”작가로 죽고 싶다“ 이렇게 외칠 정도로. 제가 명동성당에서 조사도 읽었잖아요. 그 정도로 좀 특별한 관계였어요. 이제 저도 나이가 들어가다 보니까 남은 날이 적다는 생각을 하고 보니, 어떻게 또 살아갈 것인가 마음가짐, 이런 걸 자꾸 생각하게 돼요. 이 책은 고백에 가까운데, 가톨릭 주보에 쓰신 거예요. 신자들이 굉장한 즐거움을 갖고 이 글을 읽었어요. 왜냐하면 하느님한테 글로 막 대들고 그랬거든요. 어리광도 부리고. 보통 신자들은 글 쓸 때 그렇게 못 쓰잖아요. 뭔가 파격을 보여 주니까 신도들이 굉장히 좋아 했는데, 나중에는 거기서 나오는 어떤 순수함 그런 것도 많이 느끼게 되죠.
 
-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생각이 든다고 하셨잖아요. 남은 시간에 이것만큼은 해봐야겠다는 게 있나요? 오직 연기인가요?
그렇죠. 영화 속에서 모든 얘기를 하고 싶고 표현하고 싶고 그래요. 그게 좀 더 충실하게 삶을 얘기하는 것 같고, 깊이를 갖고 사는 것일 것 같아요. 예전에 젊었을 때 책을 마구 읽은 적이 있었어요. 다독을 했어요. 무슨 책을 읽었는지 모를 정도로. 왜냐하면, 제가 고등학교 때 책을 많이 못 읽었어요. 기회가 참 없었어요. 그래서 군대 가서는 문고판 다 가지고 OP (관측소)에 올라가서 하루에 한 권씩 읽어대고 했거든요. 그때는 읽는 재미를 느꼈다기보다 욕심만 나가지고. 그리고 영화 시작한 후에도 배우 (연기자)는 책을 읽어야 된다고 얘기도 많이 했고 그런 식으로 살려고 했어요. 그런 식으로 많은 생각과 느낌을 갖고 살다 보면 나중에 지금 제 나이가 되면 거의 철학자가 돼 있을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있는데 지금 내 모습을 보면 한참 모자란 것 같아요. 사람 좋다는 이야기는 듣는데, 나름의 어떤 깊이 있는 생각 같은 것은 ······. 하여튼 지금은 세상이 좀 변해서 그런 것도 있는 것 같아요. 지금은 굉장히 가벼워진 세상이기 때문에 나도 같이 가벼워진 느낌이 있다고 보는 거지요.

- 예전엔 더 진지하셨나 보죠?
진지하게 생각했고 ······. 그러니까 그때 세상이 좀 그랬던 거죠. 그 때는 제 나이 정도 되면 굉장히 좀 어른스럽고 자기 세계를 이야기하고 좀 더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하고 이랬는데, 지금은 그것보다는 훨씬 가볍다는 거죠.

- 아까는 어른 행세하는 것 싫다고 하셨는데요.
아, 그건 에너지의 문제지요. 다른 문제였어요. 그건 고정관념에 묶이지 않고 싶다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지금도 무슨 일을 할 수 있는 에너지는 존재감과 더불어 있어야 한다고 봐요. 노쇠하면 상대도 맥 빠지게 하는 일이니까. 세상일이 늘 선택 상황에 부딪히는데 둘을 다 가질 수는 없는 것 같아요. 지금까지 오게 된 것은 어떤 긍정적인 것도 있지만 좋은 의미의 어떤 마음의 타협이 있는 것이고 적절함 속에서 살아온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배우인 경우에는 작가와도 달라서, 작가라면 ”너무 상업화된 세계는 싫어“ 이러면서 나만의 세계는 아니더라도 굉장히 의미 있는 것을 제시할 수도 있겠지만 배우는 사실 그런 삶이 힘들긴 해요.
 
- 그래도 여기 CGV에 이름을 딴 안성기 헌정관도 생긴 걸 보면 잘 살아오신 것 아닌가요.
이 아래층에 예술영화 상영하는 독립영화관이 있는데, 거기가 너무 귀퉁이에다 이름도 없이 있는 것 같으니까, 독립영화 관객들도 있다는 것을 얘기하기 위해서 헌정관이라는 이름을 붙인 거죠. 좀 더 알리기 위한 것이 있고, 또 수익금 일부는 독립영화 지원도 하고 앞으로는 분기에 한 번 정도는 관객과의 만남도 주선하고, 독립영화 쪽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행사를 마련하려고 해요. 지난달에도 와서 회의를 했어요.
 
- 좋든 싫든 한국 영화의 간판이신데 책임감 같은 것 많이 느끼세요?
물론 그런 건 있죠. 나 개인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예전부터 생각이, 처음 영화 시작할 때는 이쪽이 존중받지 못하는 일을 하는 사람, 그런 분위기에서 일을 하는 집단으로 비쳤지만, 젊었을 때 일을 하면서 영화를 하면서도 진짜 존경받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많았어요. 요즘 분위기가 상당히 거기까지 간 것 같아서 다행이고 고맙게 생각하지요. 헌정관에 이름을 붙인 것도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 역할을 하라는 의미가 있거든요. 용기를 주고 우리가 함께 나아가는, 그런 역할을 앞으로 계속 잘 해나가야 되겠죠.

- 긴 시간 말씀 감사합니다. 다음 순서로는 누구를 추천하고 싶으세요?
가수 김수철 씨를 추천합니다. 영화 <고래사냥>( 1984)에도 같이 출연했습니다만 그전부터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사이입니다. 꾸준히 한길을 가는 고집과 끈기를 좋아합니다. 늘 철들지 않은 아이 같은 모습도 보기 좋고요.

/전병근, <요즘 무슨 책 읽으세요> 369~400쪽 안성기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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