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responsibility)은 응답(response)과 연결되어 있다. 응답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대답을 하는 것이지만, 대답을 한다고 해도 응답에 있어서 중요한 건, 그 사람이 자신을 향해 오는 행위나 자신이 마주한 사건에 대해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응하는 것이다. 자기 나름의 방식인 점이 중요하며, 판에 박힌 자동적인 대답밖에 하지 못한다면 그 대답은 응답이 아니라 반응이 되어버린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각각의 인간이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응답할 가능성을 인간의 '복수성(複數性)‘이라 불렀고, 이를 인간의 조건 중 하나로 꼽았다. 아렌트가 말하는 복수성이란 단순히 개체 수가 둘 이상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예를 들어 어떤 생물의 개체 수가 아무리 많아도, 동일한 자극에 똑같은 반응밖에 되돌려주지 못한다면, 거기에는 아렌트 가 말하는 복수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을 향한 행위나 자신이 마주한 사건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할 때 사람은 괴로움을 느낀다. 그것이 일상이 되면 괴로움을 참을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응답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채로 있다는 건 인간의 복수성이라는 조건에 제대로 참여할 수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복수성에 제대로 참여하지 못하면, 그 사람은 응답하는 '상대'로 여겨지지 않게 된다. 상대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건 주위 사람들로부터 응답해야 할 상대방으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것, 자기들과 비슷한 동등한 사람으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때 거기에 나타나는 것은 응답이 없는, 그저 반응으로 채워진 공간일 것이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나를 위해 책임을 다하지도, 내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위해 책임을 다하지도 않는다.
사람이 주위로부터 반응뿐 아니라 응답을 받고 있을 때 거기에는 일상이라고 불리는 풍경이 있다. 사람이 일상을 실감하는 건 필시 주위로부터 반응뿐만 아니라 응답을 받고 있을 때다. 그런데 응답하고 응답받는 상태가 무조건 당연한 건 아니다. 응답하고 있는데 응답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는 사람도 있을 테고, 응답 수단을 현저하게 제한당하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상은 결코 당연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획득되어야만 한다. 일상은 삶의 출발점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 나간 끝자락에 있다.
/구마가야 신이치로 & 고쿠분 고이치로, <책임의
생성> 중에서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각각의 인간이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응답할 가능성을 인간의 '복수성(複數性)‘이라 불렀고, 이를 인간의 조건 중 하나로 꼽았다. 아렌트가 말하는 복수성이란 단순히 개체 수가 둘 이상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예를 들어 어떤 생물의 개체 수가 아무리 많아도, 동일한 자극에 똑같은 반응밖에 되돌려주지 못한다면, 거기에는 아렌트 가 말하는 복수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을 향한 행위나 자신이 마주한 사건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할 때 사람은 괴로움을 느낀다. 그것이 일상이 되면 괴로움을 참을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응답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채로 있다는 건 인간의 복수성이라는 조건에 제대로 참여할 수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복수성에 제대로 참여하지 못하면, 그 사람은 응답하는 '상대'로 여겨지지 않게 된다. 상대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건 주위 사람들로부터 응답해야 할 상대방으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것, 자기들과 비슷한 동등한 사람으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때 거기에 나타나는 것은 응답이 없는, 그저 반응으로 채워진 공간일 것이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나를 위해 책임을 다하지도, 내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위해 책임을 다하지도 않는다.
사람이 주위로부터 반응뿐 아니라 응답을 받고 있을 때 거기에는 일상이라고 불리는 풍경이 있다. 사람이 일상을 실감하는 건 필시 주위로부터 반응뿐만 아니라 응답을 받고 있을 때다. 그런데 응답하고 응답받는 상태가 무조건 당연한 건 아니다. 응답하고 있는데 응답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는 사람도 있을 테고, 응답 수단을 현저하게 제한당하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상은 결코 당연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획득되어야만 한다. 일상은 삶의 출발점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 나간 끝자락에 있다.
/구마가야 신이치로 & 고쿠분 고이치로, <책임의
생성>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