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기 위해서 12권보다 더 진도를 빠르게 나가서 12권의 끝이 어디인지 되짚어 맺음점을 만들기 보다는 독후감마다 다른 시선으로 써 보는 것이 낫겠다는 마음이 들어 두서 없는 글을 적어본다.
책에서는 크세니아, 영화에서는 제우스의 법. 미지의 대상인 방문객에게는 우리식 호구조사를 하기 전에 일단 배불리 먹이고 잘 씻기고 호의를 베풀어 준다. 우리는 어디까지 모르는 자가 적의를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믿어줄 수 있을까? 그 믿음은 어디까지 지켜질 수 있을까?
이야기의 뒷부분으로 갈 수록 그 믿음들이 깨지는 순간이 온다. 퀴클롭스는 마치 새로운 간식처럼 오디세우스의 동료들을 먹어치웠고, 키르케는 호의를 베푸는 척 음식을 먹인 뒤에 찾아온 사람들을 다 동물로 바꾸어 버렸다. 지금 우리가 사는 현실은 그들에게 어떻게 비추어질까? 우리는 얼마나 서로를 믿고 호의를 베풀 줄 아는 사람인가.
보통은 어느정도의 믿을만한 룩이거나, 믿음직한 배경을 알고 있을 때 우리는 경계를 풀고 호의를 베푸는 것 같다. 최근 새로운 부서에서 아예 새로운 업무를 배우고 있는데 업무는 너무 생소하지만 원래 계시던 구성원분들이 매번 신경써서 배려해주시는 덕분에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퇴사하고 나의 직무 핏에 맞는 새로운 일을 하고 싶긴 하지만...- 그럭저럭 적응을 해 나가고 있다.
만약 내가 어떠한 입사 절차를 통해 검증된 것이 아니고, 직업이 무엇인지 모르고 외양이 통상적인 직장인의 그것이 아닌 조금 불량하고 자유로워 보이는 외양이며 행동과 태도가 불량스러웠다면 이들이 전배 온 우리를 이렇게 챙겨주고 배려해줄 수 있었을까를 생각해보면, 내가 반대의 입장이었다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다.
영화가 나오고 난 뒤에 이런 저런 평론가나 영화 유투버분들도 앞다투어 리뷰 영상을 올리고 있다. 그 중에 조승연 작가의 해석이었던 것 같은데 크세니아를 지킬 수 있는 이 믿음은 필수불가결한 조건이었을 거란 가설이다. 지금보다 훨씬 외지인의 드나듦이 적고, 그런 무역상 등을 통해서만 바깥과의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는 환경에서 오는 사람을 어느정도 서로 믿어주지 않는다면 인간적 교류 외에 대외적인 국가(?)의 확장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란거다. 오... 일리있는 말이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지금은 왜 그게 잘 되지 않을까.
환대를 했다가 피해를 본 경험이 너무 많아서?
지금은 무조건적인 크세니아를 보이지 않아도 얼마든지 바깥과 연결되어(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있어서?
나의 디폴트 모드는 환대일까 경계일까. 그것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 스스로를 돌아보고 다시 생각해보아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