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을 공유하는 종은 자연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

<스피노자의 거미> - 박지형 독후감

호떡 프로필 호떡
2026-06-18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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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완독하지 못했습니다. 절반정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으로 독후감을 작성하였습니다. 모임 전까지 완독하고 가겠습니다!)

저자는 자연에서 민주주의의 이상적 발전 방향을 발견하고자 했던거 같다.

일반적으로 어떤 복합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나, 복잡한 구조를 이해해야 할 때, 닮은 꼴의 다른 구조에서 아이디어를 얻는 경우가 있다. 이 책도 그러한 관점에서 쓰인 거 같다. 하지만 봉착한 문제의 실마리를 찾는 대표적인 방식이 하나 더 있다. 두 가지 방법을 먼저 얘기해보자.

첫 번째는 제1원리라고 불리는 방식이다. 현상을 본질까지 파내려가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불변의 전제를 찾고, 거기서부터 다시 쌓아 올리는 방식이다. 직접 찾아본 것은 아니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모든 논증의 출발점으로 제1원리를 언급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근래에는 일론 머스크가 로켓 비용을 우너자재 단위까지 분해해 재계산한 사례로 유명해졌다.

두 번째는 유사 모델의 차용이다. 다른 영역에서 해결된 것으로 보이는 문제의 구조를 가져와 다른 영역에 대입하는 방식이다. 자연 생태계가 니치 분화를 통해 한정된 자원을 둘러싼 경쟁을 해소했듯이 그 구조적 해법을 인간 사회에 대입하는 것이다. 이 책이 후자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저자는 생태계에서 민주주의 발전의 힌트를 제시한다.

두 번째 방식의 핵심은 구조적 개선 모델을 떠올리는데 있다. 그런데 모델을 유의미하게 차용하려면 먼저 문제의 구체적 진단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차용하려는 모델이 같은 종류의 문제를 푸는데 유효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두 구조가 완전 동일하진 않더라도 해법의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측면에서 막힌 사고의 물꼬를 터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델 이전에 진단에 대한 질문이 우선되어야 한다.

현대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본질적 문제는 무엇인가. 저자는 그것을 한정된 자원을 둘러싼 불가피한 생존경쟁으로 보는 듯하다. 그러나 나는 더 근본적인 문제가 그 아래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인간이 갖는 욕망의 모방성이다. 인간의 자원 경쟁이 격화되는 진짜 이유는 모든 자원이 한정되어 있어서라기 보다는 모두가 같은 것을 동시에 원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무엇을 욕망해야 할지 스스로 정하지 않고 서로를 보고 영향을 받으며 많은 경우 그대로 수용하여 자신의 욕망으로 만든다.

르네 지라르가 제시한 모방 욕망이라는 개념이 떠올랐다. 인간의 욕망은 대상에서 직접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원하는 모습을 보고 그 욕망을 따라 욕망한다. 우리는 대게 어떤 선택을 할 때 표준은 무엇인지, 남들이 더 낫다고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살핀다. 그래서 사회적 관계가 촘촘해질수록 욕망은 분산되기보다 한 점으로 수렴하는 경향이 강해진다. 자원이 유한하다는 사실보다, 유한한 자원에 더 많은 이들의 욕망이 집중되는것이 현대 사회의 자원 경쟁과 그로인한 민주주의의 위기가 내포하는 근본적 원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여기서 저자가 차용한 생태학 모델과 인간 사회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가 드러난다. 생태계에서 니치 분화가 공존을 가능케 하는 것은 경쟁하는 종들이 욕망의 대상 자체를 서로 다르게 나누기 때문이다. 소는 풀의 윗부분을 양은 지면 가까운 풀을 뜯는다. 같은 풀밭이지만 원하는 것이 다르므로 공존할 수 있다. 분화의 전제는 서로 다른 것을 원함이다. 자연의 진화 방향이 어떤 힘으로 이끌려 왔는지 모르겠으나, 인간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움직인다. 경쟁이 분화를 낳는 자연과 달리, 인간에게서는 모방이 그 분화를 반대로 모은다.

물론 인간 문명에도 니치 분화의 가능성은 분명 존재한다. 직업도 취향도 삶의 양식도 무한히 갈라질 수 있다. 그러나 모방하는 대중의 욕망은 이 분화를 하나의 표준, 유행, 더 나은 것에 대한 사회적 기준을 통해 밀집시킨다. 생태계가 서로 다름으로 공존을 만들었다면, 인간은 서로 같아지려는 속성으로 충돌을 빚는다. 그러니 자원 경쟁처럼 보여도 두 문제의 구조는 사실 정반대의 특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코나투스의 개념이 좀 애매모호하게 들리긴 하지만 내가 이해한 측면으로 설명하자면, 외부의 의도 없이 각자가 스스로 발현하는 에너지 또는 그 방향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인간처럼 타인의 시선과 관계가 촘촘하게 연결되고 노출된 사회 네트워크 안에서도 그것이 과연 자기 자신으로부터 힘을 얻어 발산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내 욕망의 방향이 정말 나에게서 나온 것인지, 아니면 타인의 욕망을 비춘 거울상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오랜 시간 깊은 사고의 과정과 사유의 검증이 필요할거 같은데, 그런 시간을 투자해 존재의 본질을 규정짓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현대인이 얼마나 될까 싶다. 어쩌면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자기다움을 발산하는 것이 아니라, 발산하고 있다고 믿는 그 방향이 진짜 자기 것인지를 가려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현대 자본주의는 분명 많은 부분에서 소수의 개체가 독점의 영역을 확대해 가는 양상을 보인다. 균형이 깨진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고쳐야 할 병이다라고 한다면 자연의 상태가 건강하고 바람직한 모습이라는 판단이 있는 것인데, 이것에 대해서는 한번에 동의하기에 판단이 깔끔하게 서지 않는다. 대중이 원하는 것이 아닐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든 대중의 생각을 개조하는것이 병을 낫게 하는 방법이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자원을 독점하고 욕망을 모방하고 표준에 가까워지고 싶어 하는 모든 대중적 경향이 균형의 교란이 아닌 인간 고유의 속성이 성실하게 발현된 결과라는 생각도 든다. 독점과 수렴은 균형의 파괴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그것은 자기를 끝없이 확장하고 더 많은 것을 끌어모으려는 생명의 오랜 경향이 인간에 이르러 가장 기술적으로 추구된 형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인간이 나쁘다 좋다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 그런 독특한 특성을 가진 종으로 진화해 온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생태계는 갖지 못한 문명의 힘이 있고, 그것으로 인해 엄청난 영향도를 만드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그것이 인간에겐 더 자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게 인간의 번영을 이끌고, 반대로 멸망으로도 이끌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오히려 선함과 평등에 기반한 민주주의야말로 자연스러운 귀결이 아니라 어렵게 만들어낸 독특한 돌연변이가 아닐까. 우리는 흔히 민주주의를 인간 본성이 자연스럽게 피워낸 꽃처럼 여기지만, 어쩌면 그것은 본성을 거슬러 가까스로 붙들고 있는 인위적 합의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날이 갈수록 어렵고 좁아지고 민감해지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일정 규모의 보통 사람들, 즉 대중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개인과는 명확하게 구별되는 또다른 종으로 봐야 할까, 인간속성의 발현을 가장 정직하게 드러내는 자연적 집단지성으로 봐야 할까. 분명 모든 개인은 저마다의 특성과 상황 속에서 일생에 걸쳐 끊임없이 변하는 다층적이고 다면적인 존재일 것이다. 그러나 역사에 남은 대중의 이야기는 내가 알고 있는 주변의 개인들과는 다른 존재인듯 싶을 때가 많다.

자연에서 민주주의를 배우려면 먼저 인간이 자연의 속성을 따를 수 있는 모범생 자질이 있는지, 아니면 자연과 뿌리는 공유하지만 가장 예외적인 학생인지 생각해봐야 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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