엎드리면 사람도 미물임을 깨닫는다

<할매> - 황석영 독후감

자장가 프로필 자장가
2026-05-22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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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자주 부르면서 기억된다


국민학교에 다닐 때가 생각났다. 선생님은 교과서에서 새로운 낱말을 보면, '국어사전'에서 그 뜻을 찾아서 공책에 옮겨 적는 숙제를 내주시곤 했다. 성경책에서 사용되는 얇은 종이(인도지, India Paper)로 만들어진 사전에서 찾는 낱말의 위치가 어디쯤일지를 찍어서 펼치고는 앞뒤로 넘기면서 그 낱말을 찾는 일은 꽤 번거로운 작업이었다. 
한글로 된 책인데 오래전에 했던 사전 찾기를 다시 해야했다. 낯선 이름, 들은 적이 있으나 모습을 그려내지 못하는 이름, 비슷한 것과 구분하지 못하는 이름, 필요할 때 꺼낼 수 없는 이름들을 찾았다. 이번엔 종이책 사전을 뒤적일 필요는 없었고 키보드로 이름을 입력하면 바로 사진과 함께 설명이 나왔다. 

월귤, 시로미, 붉나무, 개암 열매, 후박나무, 꽝꽝나무, 미선나무, 회양목, 사태풀, 갯질경이, 갯개미취, 기린초, 바위채송화, 취명아주, 띠풀, 해홍나물, 퉁퉁마디, 천일사초, 번행초, 칠면초, 알락나비, 오색나비, 엽낭게, 칠게, 농게, 길게, 밤게, 도둑게, 망둥어와 짱뚱어, 큰뒷부리도요, 마도요, 알락꼬리마도요, 붉은어깨도요, 좀도요, 깝작도요, 꼬까도요, 꺅도요, 꼬마도요는 사람이 만들지 않았지만 이름을 붙인 것들이고, 
사령(배), 활 한바탕 거리, 독살, 어살, 무꾸리, 비나리, 이엉, 당두리, 야거리, 여각, 곁꾼, 중노미, 대오리 방갓, 상제 차림, 봉놋방, 술청, 선가, 이물 돛, 허리돛, 뱃집, 뜸지붕, 킷대, 신량천역, 분도, 방지거, 공소, 뒷결박, 경을 치다, 털벙거지, 미나리꽝, 걸립패, 당목, 방각소, 쏘내기 배, 구럭, 그레, 소곡주는 사람이 만들고 이름을 붙인 것들이었다.

많은 이름들을 마주쳤지만 아마도 나는 금방 이 이름들의 대부분을 잊어버릴 것이다. 자주 부르지 않는 이름은 잊혀지기 마련인 법이다. 사람이 만들고 이름 붙인 것들은 사회와 기술, 제도가 변하면서 보기 힘들어 지게 되겠지만, 풀과 나무, 벌레와 물고기, 새의 이름은 그들을 자주 만나고 이름을 부를 수 있다면 계속 기억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 우리 땅에서 볼 수 있는 새들을 열심히 찾아다니는 분이 운영하는 블로그가 있습니다. 이 책에서 이름이 언급되는 우리 새(특히, 요즘은 도요새 사진이 많아요)들의 모습이 궁금하신 분은 네이버 '울들뫼' 블로그를 방문해 보세요. 

도요새와 생합은 계산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곳에서는 수 많은 생명이 살아가고 죽는다. 그리고 다른 생명으로 연결된다. 개똥지빠귀는 눈보라에 숨이 끊어진 뒤에 팽나무를 자라나게 하고, 떨어진 하루살이는 개미와 소금쟁이가 물어간다. 조개를 캐고 짱뚱어, 낙지, 게를 잡아 먹던 몽각의 몸은 칠게의 무리가 덮어버리고, 먼 바다를 건너온 마도요가 그 칠게를 배터지게 먹는다. 그리고 폭풍우에 내동댕이쳐진 마도요의 삭은 갈비뼈 근처엔 생합들이 흔적을 남기고 돌아다닌다. 
세월이 흘러 상제와 중제, 하제 포구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염전을 만들고, 어살을 치고, 배를 지어 연안 어업을 하면서 '깨복쟁이 섬'이라 이름을 붙였지만 갯벌과 거기 깃든 생명체와 사람들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익히고 있었다.
물이 들오면 아 우리보고 생합 그만 잡으라고, 집으로 가라고, 생합 임자가 들어오니까 우리는 가자, 그라고 오지. 생합 임자가 바다잖여. 욕심내지 말고 묵고살 만치만 잡아야지.(198)

기근과 박해와 동학군은 인간들의 일이었고, 그 일에는 생명의 연결이 없었다. 기껏해야 멍석에 말려 고향으로 돌아오거나 미나리꽝, 배다리 아래 웅덩이, 우금치 고개, 제로센 전투기에 던져져서 돌아오지 못하였다.
그리고 인간의 욕심은 수 많은 생명이 연결된 복잡하고 아름다운 체계를 개발의 이름으로 없애버린다. 인간이 아닌 생명체는 개발의 계산에 포함되지 않으며, 그렇게 만들어진 '새만금'은 더 이상 생명체들이 어울려 살아가던 그 갯벌이 아니다. 
누군가 끊임없이 개발의 이유를 발명해내고 매립과 준설의 이익을 얻는 구조를 없애지 않는 한 새만금 사업을 끝나지 않을 것이다. (207)

비가 왔고 그 빗물에 소금이 녹아 흘러내렸다. 생합들은 그게 바닷물인 줄 알았다. 죽어가면서 목마르게 기다리던 조개들은 너무나 반가워서 모두 기어 나왔다. 그렇게 펄 위로 기어 나온 생합들은 바닷물을 찾아 갯벌을 헤매다 지쳐서 천천히 말라 죽어갔다. (208)

도요새 무리는 대개가 월동지인 뉴질랜드와 호주에서 출발하여 십여일을 쉬지 않고 날아와 새만금 갯벌 일대에 도착하면 몸무게의 절반 정도가 줄어들어 있다. 새들은 갯벌에서 짧게는 이주에서 길게는 한달 반 정도 쉬며 먹이 활동을 하고 원기를 회복하여 시베리아와 알래스카의 번식지로 날아간다. 이곳 경유지는 그들의 생명선이었지만, 이제 끊어지고 만 것이다. 갯벌에서 죽기도 했지만 제대로 먹지 못한 새들은 이동하던 도중에 허공에서 기진맥진하여 떨어졌다. (209)

엎드리면 사람도 미물임을 깨닫는다


인간은 다른 생명체의 삶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특별한 존재인가? '할 수 있다'는 것이 '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단세포 생물에서 식물과 동물에 이르는 수 많은 종류의 생명체들이 인간이 등장하기 훨씬 오래 전부터 나타나서, 환경에 적응하여 생명 활동을 영위하고, 다음 세대로 생명을 이어왔다. 
각각의 인간 개체들이 생존이라는 생명체의 본원적인 지향점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그러나 집단으로서의 인간활동의 결과가 지금처럼 생태계에 파괴적 결과를 초래하는 상황이 자연스러운(혹은 피할 수 없는) 결과라고 말한다면, 인간을 특별하다고 만드는 지능, 의식, 마음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단세포생물에게는 지능이 있을까? 단세포생물은 확실히 지능을 갖고 있다. (...)
생명을 유지하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은 항상성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다. 항상성의 명령은 생명이 초기 단세포생물에서 처음 꽃피었던 때부터 생명을 가능하게 만든 조절 과정들의 정교한 집합이다. 그 후 약 35억 년이 지나 다세포생물과 다체계 생명체가 번성하게 되자 항상성은 신경계라는, 새롭게 진화한 조절 장치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이 신경계가 행동을 조절하고 패턴(신경세포의 활성 패턴)을 나타낼 수 있는 무대가 마련된 것이었다. (...)
인간의 능력을 예외적으로 생각해 인간의 대처 능력과 인간이 아닌 생물체의 대처 능력 사이의 차이를 과장하여 말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의 발로다. 이는 인간의 능력만 대단하게 여기고, 인간이 아닌 생명체의 능력은 부당하게 과소평가하는 생각이다. 또한 미생물에서 인간에 이르는 수많은 생명체들 사이의 상호의존과 협력을 인식하지 못한 생각이기도 하다. (...)
우리는 인간이 어떻게 현재에 이르렀는지에 대한 설명과 우리가 우리 유기체 안에서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 기본적인 장치들이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들이 개체와 집단의 생존을 위해 오랫동안 사용해온 장치들이 변형되고 업그레이드돼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 사이에서 균형 감각을 유지해야 한다. _ 안토니오 다마지오, 『느끼고 아는 존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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